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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기자의 글로벌 이슈&]영국도 탐내는 독일식 ‘청년 일자리 상륙작전’

입력 | 2017-05-08 03:00:00


독일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도제 교육생(왼쪽)과 마이스터 자격을 가진 장인의 작업 모습. 독일 직업 훈련생의 65%는 학교와 기업 현장에서 일과 학습을 병행한다. 신청자의 70%가 20세 미만이다. 동아일보DB

박용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5년까지 NBC의 TV 리얼리티 쇼 ‘어프렌티스(Apprentice·견습생)’에 출연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그는 성과가 떨어지는 견습생 출연자는 “넌 해고야(You‘re fired)”란 말과 함께 가차 없이 집으로 돌려보냈다. 능력을 입증하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면 고액 연봉을 주고 자신의 회사에 영입했다.

트럼프가 보여주는 생생한 승자 독식의 미국식 ‘능력주의(Meritocracy)’는 이 TV 쇼의 인기 비결이었다. 테스트를 통과하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트럼프 견습생들은 정규직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는 한국 기업의 청년 인턴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미국에선 파리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견습생이지만 대서양 너머에선 대접이 다르다. 최근 유럽에선 독일식 견습생 제도가 청년 실업을 극복하고 제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장치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올해 3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다. 그는 잠시 짬을 내 독일 고급차 브랜드인 메르세데스벤츠 공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독일 제조업의 생생한 현장을 둘러보던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3만5000명이 일한다는 이 공장에서 직원을 도통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직원들이 다 어디에 있지요?”(이 총재)

“직원 대부분은 연구개발(R&D), 디자인 분야에서 일하거나 직업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공장 관계자)

인건비가 비싼 독일의 제조업은 품질은 뛰어나지만 한국이나 중국 등에 비해 가격 경쟁력은 떨어진다. 독일 제조업이 살아남으려면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인건비가 싼 해외로 공장을 옮기든지, 자국 공장을 R&D와 디자인 경쟁력을 통한 고부가가치 제품의 생산 거점으로 전환해야 한다. 벤츠 공장은 후자에 속한다.

특히 이 공장의 상당수 직원이 직업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미국이 독일 제조업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미 브루킹스연구소는 독일 제조업의 강점으로 이 같은 숙련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꼽았다.

기술과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가 빨라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엔 학교와 산업 현장의 ‘기술 격차(skill gap)’가 커진다. 직무 경험이 없는 청년들은 첫 직장에 상륙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독일은 이 문제를 일선 학교와 기업 현장에서 일과 학습을 병행하는 ‘견습생 프로그램(듀얼 시스템)’으로 극복하고 있다. 기업들은 필요한 역량을 가진 인력을 확보하고, 청년들은 잘 훈련된 독일 병정처럼 일자리 시장에 상륙해 독일 제조업을 이끄는 ‘장인’으로 커 간다. 지난해 말 유럽연합(EU) 회원국의 청년 실업률은 평균 17.3%다. 그리스는 44.7%, 스페인은 44.4%로 청년 일자리의 무덤이다. 하지만 독일의 청년 실업률은 6.7%로 한국(9.8%)보다도 낮다.

독일식 견습생 제도가 청년 실업난 극복에 특효약으로 떠오르자 청년들의 직업 훈련에 전통적으로 둔감했던 영국까지 독일 배우기에 나섰다. 영국은 2010년 이후 2015년까지 독일식 견습생 자리를 220만 개 만들었다. 청년 실업률을 EU 평균보다 낮은 12.1%로 떨어뜨린 영국은 내친김에 2020년까지 견습생 자리를 3만 개 더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지난달엔 인건비의 0.5%에 해당하는 ‘견습생 부담금(apprenticeship levy)’을 기업에 부과하는 제도도 도입했다. 이 돈을 견습생 프로그램에 지출할 수 있는 ‘바우처’로 기업에 돌려줘 참여를 이끌어 내겠다는 것이다. 학교와 산업 현장 간 ‘스킬 갭’을 줄이기 위해 ‘T-레벨’이라는 기술 교육 과정과 학자금 대출을 확대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식 견습생 제도가 다른 나라에서 실패하는 이유로 3가지를 꼽았다. 첫째, 할아버지 아버지 등 대를 이어 경험한 견습생 제도의 성공 경험이 다른 나라엔 없다. 둘째, 학교 교육에서 성공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인식된다. 셋째, 독일처럼 자격증 없이는 일하기 어려운 일자리 시장이 없다는 것이다. 견습생 제도가 뿌리내리려면 사회의 문화와 인프라를 바꾸는 일이 시급하다는 뜻이다. 2013년 마이스터고에 독일식 견습생 제도를 도입한 한국은 이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특히 대학 진학률이 한때 80%를 넘었던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면 4년제 대학 1, 2학년으로 견습생 제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차기 정부에선 정부-대학-기업이 손을 잡고 ‘한국식 청년 일자리 상륙작전’에 성공하면 좋겠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