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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위슬랏의 한국 블로그]“한국에선 공약보다 번호가 중요한가요?”

입력 | 2017-05-09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재코 즈위슬랏 호주 출신 법무법인 충정 업무환경개혁 이사

오늘이 바로 대선, 그날이다. 나는 외국인이라 대선 투표권은 없지만, 지방자치단체의 선거에는 참여할 수 있다. 영주권을 딴 뒤 서울시장 선거 두 번을 포함해 모두 세 번 투표했다. 아내는 언제나 내게 “누구를 뽑았느냐”고 묻는다. 자신이 뽑고 싶은 후보를 나도 뽑았으면 하는 생각에서란다. 그런데 나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대들보는 비밀투표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는 투표 참여가 의무다. 선거일에 투표하지 않고 소풍을 가면 나중에 벌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나처럼 호주 밖에 거주하는 호주 사람은 투표를 안 해도 된다. 그래서 호주를 떠난 2004년 이후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호주가 의무투표제를 채택한 이유는 호주가 국가가 된 1901년 당시에는 인구가 적고 시골에 사는 사람이 많아 투표율이 낮았기 때문이다. 낮은 투표율로 선거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1924년에 의무투표제가 도입됐다.

이번 한국 대선에서는 누가 당선될지가 가장 궁금하지만 그와 함께 투표율이 얼마나 높을지도 관심이다. 2012년에는 76%로 꽤 높았다. 그런데 그 전인 2007년에는 63%에 불과해 역대 제일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투표도 하지 않은 유권자가 당선자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꽤 웃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광화문 촛불집회의 열기에 버금가는 투표율이 나왔으면 한다.

모든 나라에는 각 나라의 상황, 역사, 전통에 맞는 선거문화가 있다. 한국에서는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번호를 외치는 선거운동원과 유세 차량을 볼 수 있다. 한국의 독특한 선거문화이지만 정당별로 볼 때는 별로 개성이 없어 보인다. 모든 선거운동원이 소속 정당을 나타내는 모자와 조끼를 착용하고, 지하철역 입구나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나란히 서서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절을 하고 “몇 번 누구누구입니다, 어쩌고저쩌고!”라고 외친다. 그런데 거기서 불과 몇 m 떨어진 곳에서도 또 다른 그룹이 똑같이 하고 있다. 정당별로 색깔만 다를 뿐 홍보 방법은 똑같다. 정책 강령이나 선거공약은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 번호와 색깔만 중요하다. 정치란 그렇게 간단하게 색깔을 정하는 일일까.

유세차는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후보자의 선거 연설이나 소위 ‘캠페인 송’을 쾅쾅 울려댄다. 어떤 경우는 아예 한곳에 주차시켜 놓고 몇 시간 동안 같은 말 또는 노래를 가장 높은 볼륨으로 틀기도 한다. 이번 캠페인에 어떤 사람들이 유세차를 훼손한 혐의로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이 물론 불법인 것은 인정하지만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심정도 든다. 이 나라에는 소음공해 단속법이 있지 않은가.

얼마 전에 절을 하면서 구호를 외치는 선거운동원과, 유세차를 휘몰고 다니는 사람들이 정당에서 돈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내가 아는 사람 중 한 명이 그 일을 신청했지만 경쟁이 심해서 떨어졌단다.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거운동원들은 당에 대한 충성심에 자원봉사로 하는 줄 알았다. 돈을 번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 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친구들을 통해 조사해 봤더니 다른 나라에서는 대부분 자원봉사로 선거운동을 한다는데….

한국 정치에 대해 많은 외국인은 한국은 정당보다 정치인이 더 중요한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한다. 왜냐하면 정당들의 수명이 짧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정치수명보다도 짧다. 만약에 한 외신기자가 대선마다 한국을 방문한다고 치면 지난번에 있었던 정당들의 상당수가 없어졌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광복 직후에는 300개가 넘는 정당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지난 70년의 한국정치사가 보여준다. 이제 거의 전통이 된 것 같다. 너무나 손쉽게 창당, 탈당, 출당, 분당, 합당, 해당이 이뤄진다. 그렇다 보니 정당의 정치강령이 그렇게 큰 역할을 하기 어렵고 후보자의 인격, 카리스마 그리고 개인적 야심이 더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지난주만 해도 13명이 이런 순환의 고리를 따르지 않았던가.

재코 즈위슬랏 호주 출신 법무법인 충정 업무환경개혁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