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에 바란다(1)
참으로 어둡고 긴 터널이었다. 박근혜 정권 후반기 들어 대한민국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성장 엔진은 꺼졌고, 양극화가 심화돼 공동체는 무너졌다. 여야 정당은 내부 권력다툼에만 빠져들었으며 지도자는 무능했다. 노(怒)한 민의는 4·13총선에서 기득권 정치에 심판을 내렸으나 누구도 변하지 않았다. 국본(國本)이 무너진 나라의 밀실에서 전근대적인 국정 농단이 횡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민은 촛불을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이젠 변하라!”
오늘 우리는 그 질곡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엄혹한 상황을 버텨낸 것은 초유의 대통령 탄핵을 평화적으로 이뤄낸 시민의 힘이었다. 변화를 염원하는 민의(民意)의 선택은 문재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레이스 내내 수위 자리를 뺏긴 적이 없다. 그의 안보·대북관에 대한 불안, 그를 둘러싼 세력의 교조적 행태에 대한 불만도 변화를 바라는 민심을 이길 순 없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득표율은 40% 안팎이다. 지지한 사람보다 지지하지 않은 국민이 더 많다. 문 대통령은 어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당선 인사에서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들도 섬기는 통합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맞는 말이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지지하지 않은 국민들로부터 될수록 많은 동의와 공감, 승복을 얻어내 전 국민의 대통령이 돼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통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문 대통령은 선거 직전 “당선되면 바로 야당 당사를 방문하겠다”며 “정치 보복은 없다”고 공언했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그 당연한 원칙을 지키지 못한 대통령이 적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 임기 말 비극의 씨앗이 됐다. 대통령이 직접 보복을 지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통령의 뜻을 지레짐작한 측근들이 칼을 들이대기 일쑤였다. 문 대통령이 약속대로 정치 보복의 사슬을 끊으려면 주변부터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
“민생 대통령, 대통합 대통령이 되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 일성(一聲)이 아니다. 전임 박 대통령의 당선사였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통합은커녕 결국 촛불과 태극기로 나라를 두 동강 내는 분열의 아이콘이 됐다. 통합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문 대통령은 오늘부터 청와대 비서진과 국무총리, 장관과 권력기관장 인사를 순차적으로 단행할 것이다. 첫 인사부터 반대자 비판자 경쟁자를 중용하기를 강력히 권한다. 그런 탕평이야말로 문재인이 집권하면 편 가르기와 인적 청산으로 ‘노무현 시즌2’가 도래할 것이라며 ‘文포비아’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성공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열쇠다.
무엇보다 국무총리 인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문 후보가 책임총리제를 공약한 이상 실질적으로 장관 임명 제청권을 행사하고 대통령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있는 의지와 역량을 가진 인물을 지명해야 한다. 총리 지명자의 면면을 보면 과연 책임총리가 될 수 있을지, 아니면 과거의 얼굴마담, 방탄 총리를 답습할지 국민은 다 안다. 한국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인 것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인사권 때문이다. 전임 대통령의 청와대는 일개 부처의 국·과장 인사까지 간여했다. 인사권을 각 부처 장관에게 획기적으로 하방(下放)해 정부 조직의 피가 잘 돌게 하는 것이 소통과 분권의 시대정신에 맞다.
문 대통령은 당선을 자축하기에 앞서 자신의 앞에 놓인 시련과 갈등을 직시하기 바란다. 87년 체제 30년이 낳은 비효율과 불합리, 기성 정치세력의 이전투구가 잉태한 사회 갈등, 지난 세월의 비극이 낳은 상흔 등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적폐다. 이를 해소하려면 국민과 격의 없이 자주 소통해야 한다. 달콤한 말이 아닌 눈물과 땀, 고통 분담을 호소할 수 있어야 진정한 대통령이다.
69년 전 오늘 제헌국회 의원을 뽑는 5·10총선이 실시됐다. 오늘날 대한민국 건설의 주춧돌을 놓은 최초의 근대적 선거였다. 이 뜻 깊은 날에 한국호(號)는 문재인 선장의 지휘 아래 격랑의 바다로 새로운 항해를 떠난다. 새 선장은 정신 바짝 차리고 단호하되 따뜻한, 효율적이지만 열린 리더십으로 위기의 바다를 헤쳐 나가야 한다. 자칫 권력에 중독돼 내 편, 네 편을 나누고 독선과 독단에 빠지는 리더십은 나라뿐 아니라 지도자 자신까지 위험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목도했다. 19대 대통령 문재인. 그가 저주처럼 지속됐던 불행한 대통령의 사슬을 끊는 첫 대통령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