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드’는 왜 죽지 않는가
SBS ‘언니는 살아있다’는 출생의 비밀, 재벌가의 암투 등이 주요 소재다(첫번째 사진). MBC ‘당신은 너무합니다’에서 엄정화는 스타 가수가 되기 위해 아들을 버리는 비정한 어머니로(두번째 사진), KBS ‘완벽한 아내’에선 등장인물이 사이코패스가 되는 등 2017년 방송가에도 막장 드라마가 넘쳐나고 있다. 각 방송사 제공
TV를 보던 에이전트26(유원모)은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14년 MBC 주말극 ‘왔다! 장보리’의 악녀가 2017년 KBS2 드라마에 나올 리 없지 않은가. 아하, 그럼 그렇지. 자세히 보니 배우도 조여정(이은희 역)이다. 어라, 근데…. 왜 이렇게 닮았지. 미니시리즈 ‘완벽한 아내’(2일 종영)는 로코(로맨틱코미디) 아니었나. 알고 보니 완벽한 막드(막장드라마)인걸. 그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에이전트2(정양환).
“정신 차리게, 요원26! ‘제국의 역습’이네. 막장이 또다시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네.”
○ ‘막스’ ‘막사’ 하이브리드 막장의 시대
탐지기에 걸린 막드는 각양각색이었다. 대놓고 막장을 내세운 작품부터 묘한 혼종까지. 막드의 본거지인 아침·일일드라마는 예외로 치자. 지난달 15일 시작한 SBS 토요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도 예상했던 바다. 한때 ‘막장 F4’로 불렸던 김순옥 작가의 신작이니까. 그런데 ‘완벽한 아내’나 SBS ‘피고인’, MBC ‘당신은 너무합니다’ 등 장르 불문하고 막장 논란이 불거진다. ‘막스(막장 스릴러)’ ‘막사(막장 사극)’란 말도 빈번하게 쓰인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본질적으로 스토리 얼개를 무시하고 자극을 남발하는 게 ‘막장’의 생리”라며 “케이블TV 드라마가 성장하며 경쟁이 치열해지자 장르물에 막장 코드를 갖다 쓰는 풍조가 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최근 경향을 보면, 처음엔 그 나름대로 ‘정상적’이었다가 뒤로 갈수록 얼토당토않은 전개가 펼쳐진다는 점도 공통분모다. ‘피고인’이나 ‘완벽한 아내’만 해도 초반엔 “웰메이드 스릴러” “색다른 취향의 로코”란 호평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정의롭던 국선변호사가 검사 사무실에서 도둑질하고, 점잖던 가정주부가 ‘미저리’ 최강 사이코로 뒤바뀐다. 한 누리꾼은 “완벽한 아내는 원작이 ‘지킬과 하이드’냐”라고 비아냥거렸다.
이런 막드의 무한확장성은 어디서 오는 걸까. ‘우리는 왜 막장드라마에 열광하는가’(프로방스)를 집필한 최성락 동양미래대 교수는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의 제작 시스템’이 이런 혼합된 형태의 막드를 양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해외와 달리 여전히 한국에선 사전제작은커녕 대본이 완결된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가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방송사 윗선이나 시청자 반응에 영향을 받을 여지가 너무 크죠. 잘되면 억지 연장방송, 안 되면 자극적인 에피소드 남발. 특히 막장 코드는 논란이든 뭐든 어쨌든 화제가 되니까요.”
단지 그뿐이 아니다. 나올 때마다 비난이 봇물 터지듯 하지만, 사실 막드는 정서적으로 시청자의 취향을 묘하게 건드린다. ‘갱도의 막다른 곳’을 뜻하는 막장이 드라마와 결합된 건 대략 2000년대 초반부터. 하지만 출생의 비밀이나 복잡한 악연은 이전부터 반복된 소재다. 최 교수는 “따지고 보면 그리스신화나 한국 설화에도 막장은 줄기차게 등장했다”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오이디푸스, 얽히고설킨 주몽이나 온조왕의 가계를 보면 요즘 막장 못지않다”고 설명했다. 실은 우리 DNA 자체가 막장에 반응하는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요즘 막드의 범람은 주 시청자로 꼽히는 중년여성 책임만은 아니다. 대체로 비난하는 입장인 젊은층도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작품을 거론하고 동영상클립을 공유하며 자기도 모르는 새 ‘화제성’을 올려준다. 한 드라마 제작사 PD는 “전형적인 노이즈마케팅이지만 결국 SNS 주목도가 올라가면 광고단가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며 “경제적 압박이 심할수록 작가나 제작진으로선 그 유혹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털어놨다.
사회적인 측면도 있다. 삶이 팍팍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지쳐 단순하고 자극적인 걸 더 찾는단 분석이 나온다. 게다가 막장의 주요 장치인 ‘세상 어디에도 없을 악당’은 은연중에 “그래도 내 인생은 괜찮은 편이다”는 위로를 건넨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막드는 방송사 입장에선 ‘타율 좋은 타자’이고 시청자에겐 맛 좋은 ‘불량식품’”이라며 “큰 모험을 하지 않는 선에서 안정된 수익구조를 창출하는 ‘서로 합의된’ 코드인 셈”이라고 진단했다. (다음 회에 계속)
정양환 ray@donga.com·유원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