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518년, 27명의 국왕이 조선을 다스렸다. 27명의 국왕 중 호화롭게, 자기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먹었던 이는 연산군 한 명이었다. 귀한 과일을 수입하고, 전국의 모든 귀한 식재료를 강제로 모으고 먹었다. 폭군이고 결국 왕좌에서 쫓겨났다.
광해군도 반정으로 쫓겨났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8년 즉위했다. ‘잡채상서(雜菜尙書)’ ‘사삼각노(沙蔘閣老)’ ‘김치정승(沈菜政丞·침채정승)’ 등은 광해군 무렵 등장하는 표현이다. 간신들이 잡채, 더덕, 김치 등을 바치고 높은 벼슬을 얻었다는 뜻이다. 광해군은 덕수궁에서 즉위했다. 덕수궁은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 집이었다. 덕수궁에서 선조가 살았고, 광해군이 즉위했다. 김치, 더덕, 잡채는 예나 지금이나 산해진미는 아니다. 사저에서 즉위하고 신하들이 주는 김치, 더덕, 잡채를 얻어먹었다.
태종과 영조는 강력한 왕이었다. 태종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즉위 13년(1413년) 7월, 가뭄이 들었다. 당연히 금주(禁酒)다. 신하들이 ‘가뭄 대비책’으로 올린 상소 중에 ‘태종의 술’이 등장한다. 에둘러서 ‘임금부터 금주를 엄격히 금하라’는 내용이다. 태종은 “내가 술 많이 마시고, 좋은 안주 먹는다고 하는데, 궁중 주방 조리사한테 물어보면 별것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변명한다.
영조는 금주령을 강력하게 지켰다. 국가 행사 중 제일 중요한 종묘 제사와 중국 사신 접대에도 술 대신 단술을 사용케 했다. 신하들이 “(금주령은 국내 사정인데) 외국 사신에게 술 대신 단술을 주는 것은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고 하자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제사에도 단술을 사용한다고 하라”고 자른다.
영조가 일흔다섯 살 되던 해(재위 44년·1768년) 7월, 노대신 김양택과 나눈 대화가 남아 있다. 영조가 “송이버섯, 생전복, 어린 꿩, 고추장, 이 네 가지가 맛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내 입맛이 아주 늙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송이버섯이나 전복은 고급 식재료다. 김양택이 “생전복을 별도로 올리라 할까요”라고 묻는다. 영조가 답한다. “생전복 채취가 쉽지 않다. 지금 생전복을 올리라는 것은 민폐다. 어찌 내 입맛을 위해서 생전복을 올리라 하겠는가.”
존재하지 않았던 ‘왕의 밥상’은 어떻게 생겼을까. 제국 시기를 거친 로마, 유럽, 중국, 일본 어디에도 제왕의 화려한 밥상은 없다. 왜 하필 우리만 왕의 밥상을 이야기할까. 결론은 슬픈 식민시대의 잔재다. 그들에게는 무너진 왕조의 식민시대가 없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