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2030 세상/최지훈]그동안 잊고 있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입력 | 2017-05-10 03:00:00


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봄을 맞아 푸르게 피어나는 산과 들을 보노라면 무작정 내달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친구들을 연신 불러대며 녹초가 될 때까지 뛰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어린이날의 설렘을 여전히 기억한다. ‘북포국교’라고 적힌 졸업장 덕분에 겨우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국민학교 졸업생이다. 채변봉투에 ‘물건’을 담아 담임선생님께 제출했고, 월요일이면 무거운 폐지 한 봉지를 들고 가 증표를 받아야 했으며, 손버릇이 나쁜 친구가 자수할 때까지 모두 눈감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삐라를 주워 볼펜과 바꿔 쓰곤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강당에 모여 반공영화를 보기도 했다. 기억났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연휴를 맞아 가족 모두가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장소를 물색하던 중 경기 연천이 좋다는 지인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왜 좋은지는 물어보지 않았던 듯했다. 연천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나에게 연천은 국사 시간에 나오는 석기의 출토지거나 전방부대의 이미지가 있을 뿐이었다.

군부대와 작은 읍내가 있는 흔한 전방 도시겠거니 하고 도착한 연천은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서울의 북쪽은 산악지대라는 선입견이 있던 나에게 연천의 넓은 평지는 놀라웠다. 그뿐만 아니라 산과 들의 풍경이 어딘가 모르게 달라 보여 외국에 와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후에 들은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연천 일대는 화산으로부터 흘러내려 온 용암이 굳어 이루어진 땅이며 그 땅 위를 흐르는 물줄기가 지금의 독특한 풍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산이 있는 지역이라면 그 동네의 유명한 폭포나 계곡이 있기 마련이다. 연천에는 재인폭포라는 유명한 폭포가 있었다. 용암지대에 형성된 폭포답게 주상절리가 낙수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어 풍경이 멋지고 높이도 높아 웅장한 폭포였다. 마치 거대한 돔의 꼭대기에서 물이 떨어져 내리는 모양새였다. 폭포를 동그랗게 감싼 돌들은 주상절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둥처럼 솟아 폭포를 떠받들고 있었다. 탄성이 나올 만했다.

밑에서 올려다본 폭포는 또 다른 감흥을 주었다. 기둥 모양의 바위들이 줄 맞춰 하늘을 향해 있는 것이 마치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더니 그건 그랜드캐니언을 가보지 못해서 하는 소리라는 면박만이 돌아오긴 했다.

물가에는 폭포를 담당하는 직원이 있어 안전 통제와 간략한 폭포 설명을 쉴 새 없이 하고 계셨다. 용암이 빨리 굳어 생긴 지대는 다소 무른 특징이 있어 폭포에 쉽게 깎인다는 이야기였다. 지금도 폭포의 경계는 계속 깎여 위치가 변하고 있으며 따라서 낙석에 주의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앞으로 한참 동안은 무른 땅이 이어지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 우리는 이 폭포를 볼 수 없다는 농담 아닌 농담도 얹혀 있었다. 재인폭포는 군사분계선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금씩 북으로 이동하는 중이라는 얘기다. 잊고 있던 우리의 소원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언젠가부터 잊고 살았다. 대학입시, 첫사랑, 전역, 취업 등의 세속적인 소원들이 앞선 20대였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해도 TV에서 통일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다뤘고 실제로 주변에 실향민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까맣게 잊고 살았다. 수차례 좌절되어 온 희망이 쌓여 우리를 지치게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망이 거듭되니 외면으로 내 마음을 지켜냈나 보다. 그렇지만 수십만 년째 흐르고 있는 내 눈앞의 물줄기가 남북으로 잘려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붙어있는 강산을 이렇게 갈라두고 왕래를 막는 일이 말은 되는 상황인지 갸우뚱하다.

이제 30대들 중엔 통일이 남 일인 듯 느끼는 이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며 소리 높여 부르던 멜로디가 생생하다. 내 안에도 흐르고 있을 우리 민족의 혼이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통일이 소원이라고, 속세의 모든 소원을 걷어내면 어렸던 내가 목청껏 부르던 그 소원이 여전히 있다고.
 
최지훈 호호스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