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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식의 오늘과 내일]새 대통령, 문화는 내버려 둬라!

입력 | 2017-05-10 03:00:00


김갑식 문화부장

장미 대선으로 불리는 짧은 선거 기간, 심지어 인수위원회조차 꾸릴 수 없다고 한다. 역대 어느 정권보다 촌각을 다퉈야 하는 바쁜 대통령이 될 듯하다.

지난달 차기 정부의 문화정책을 다루는 세미나와 포럼이 잇달아 열렸다. 박근혜 정권에서 논란이 됐던 블랙리스트 방지와 예술인 복지 확대 등을 빼면 대선 주자들의 문화정책은 알맹이가 없다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다.

역대 정부와 비교해도 새 정부의 문화정책은 ‘제로’에 가깝다. 김대중 정부는 처음으로 문화예산 1%를 넘겼고, 박근혜 정부는 최순실 국정 농단이라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문화융성을 국정 기조의 하나로 내세웠다.

문화정책 부재(不在)의 원인은 무엇보다 최순실-차은택 등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때문이다. 겉으로는 한류 지원과 문화산업에 대한 육성, ‘문화가 있는 날’을 통한 문화 향유의 확대가 명분이었다. 하지만 속사정은 국민 세금과 기업의 준조세로 만들어진 재원에 대한 비선 실세의 ‘곶감 빼먹기’였다. 문화융성이라는 허울이 초유의 대통령 탄핵의 단서를 제공한 탓에 이 단어는 새 정부의 ‘금기어’가 됐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있다. 아니, 실체를 드러낸 국정 농단을 보면 빈대가 아니라 도둑이 들었다. 하지만 도둑이 미워도 문화라는 집을 태우거나 폐가로 만들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하다. 문화산업이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핵심 키워드의 하나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동남아는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에서도 가수 싸이와 그룹 ‘빅뱅’ ‘방탄소년단’,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어느새 한류는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됐다. 그 언어가 글로벌 경쟁을 벌이고 있는 기업들의 든든한 배경이다.

새 정부 문화정책의 ‘첫 수(手)’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최근 만난 몇몇 문화인의 훈수를 옮겨본다.

“역대 정권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박근혜 정부처럼 마음에 안 든다고, 밉다고 블랙리스트 만들어 차별대우하지 말아야 한다. 기호 2번(홍준표 후보)의 막말이 귀에 거슬리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문화계 코드 인사가 큰 문제였다는 주장도 사실이다.”(A 씨)

“문화정책, 차라리 없는 게 낫다. 그냥 ‘내비 두면’ 좋겠다. 문화인들의 ‘디그니티(dignity·위엄, 품위, 존엄성, 자존감)’를 지켜주기 바란다. 이른바 적폐청산이라는 잣대를 문화계에 들이대면 우리 문화, 문화산업은 다시 10년 뒤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B 씨)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을 ‘복기’할 때 이들의 말은 타산지석이다. 비선 실세가 문화계를 국정 농단의 놀이터로 삼은 것은 그만큼 문화 분야가 탈이 덜 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주장에 토를 달 수 없었고, 선거 뒤 논공행상의 전리품을 나눠줘도 정치 경제 등 다른 분야에 비해 잡음이 적었다.

권력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원칙적인 조언도 있다. “권력과 문화의 불협화음은 당연하다. 권력의 나팔수가 된 문화의 역겨움은 과거 숱하게 지켜봤다. 연극에서 날 선 대사로 힘센 자를 비판하고, 노래로 비꼬는 게 문화의 매력 아닌가?”(C 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중문화계 스타들의 불화는 오래된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아카데미와 그래미 시상식에서 대통령을 비판했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돈으로 감투로 문화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보고, 바꾸려고 한 게 박근혜 정부의 오만이자 비극의 씨앗이었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