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시대 한국경제]10년만의 진보 정권, 숨죽인 재계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지난달 14일 대한상공회의소가 연 ‘대선후보 초청 특별강연’에서 경제 관련 정책 구상을 밝히고 있다. 문 대통령이 대기업 규제와 중소기업 육성에 초점을 둔 공약을 내놓으면서 대기업들은 긴장하는 반면에 중소기업계는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대기업 복합 쇼핑몰 입점으로 우리 50, 60대 자영업자들이 일방적인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제가 각별히 챙기겠습니다.”
지난달 21일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인천 부평역 앞 유세에서 “상생협력 방안을 입법으로 제도화하겠다”고 강조했다. 연설 직후 지역 상인들은 환호했고, 신세계는 곤혹스러워했다. 문 대통령이 신세계의 부천 복합쇼핑몰 계획에 대해 사실상 반대의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신세계는 당초 ‘스타필드 부천’을 세우기로 부천시와 협약을 맺었지만 인근 인천 부평 지역 상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백화점으로 계획을 바꿨다. 백화점은 골목상권과 겹치는 부분이 적다는 게 이유였다. 신세계와 부천시는 아직 토지 매매 계약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특히 유통업계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새 정부가 소상공인 보호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만큼 내수 대기업이 집중 타깃이 될 수 있어서다. 문재인 정부의 ‘대기업 규제-중소기업 및 소상공인 지원’이라는 경제정책이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례다.
문 대통령은 “재벌과 대형 유통업체가 골목상권과 전통시장을 무너뜨렸다”고 강조해 왔다. 공약에도 도시계획 단계부터 복합쇼핑몰 입지를 제한하고 복합쇼핑몰에 대해 대형마트와 같은 수준의 영업제한(매월 공휴일 중 2일 휴업)을 하는 방안을 담았다.
공약이 현실화하면 ‘스타필드 하남’ 같은 복합쇼핑몰은 한 달에 두 번 주말이나 공휴일에 문을 닫아야 한다. 최근 백화점, 아웃렛이 대형화되고 문화시설이 결합되는 추세라 사실상 대규모 점포는 모두 규제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실제 신세계는 광주에 백화점과 호텔을 함께 지으려다가 시민단체와 더불어민주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유통업계는 “어려운 골목상권의 문제를 대기업과 소상공인 간 대립으로 보지 않길 희망한다”고 호소한다. 온라인 판매가 대형마트를 제친 상황에서 전통시장 쇠락의 원인을 대규모 점포에서 찾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이다. 복합쇼핑몰은 주로 교외에 있어 골목상권과 겹치지 않고, 내수 살리기와 국내 관광 촉진 정책과도 배치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스타필드 하남의 경우 직접고용 인원만 5000명 수준이다.
지주회사로의 전환 움직임도 대폭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지주회사 요건과 규제를 강화하겠다며 자회사 의무 소유 비율을 높이겠다고 공약했다. 삼성전자는 이미 지주사 전환을 포기했다. 10대 그룹 관계자는 “신임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언급한 재벌 개혁, 청년고용할당제 강화, 산업용 전기료 인상 등은 현재 경제상황에 맞게 신중한 검토를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중견기업들도 문 대통령이 자칫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이분법적인 틀로 경제구조에 접근하면서 ‘샌드위치’ 신세가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중견기업 관계자는 “재벌 개혁 하겠다고 내놓은 규제 공약들을 보면 중견기업까지 포함돼 있다. 진입 규제 같은 칸막이를 치면 중견기업들은 아래 위에서 규제를 받게 돼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 고무된 중소기업, 일부 공약은 걱정
중소기업계는 문 대통령이 대기업 중심 성장구조에서 벗어나 중소기업을 육성해 ‘국민성장 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한 것에 고무돼 있다.
문 대통령이 내걸었던 중소기업 공약은 지원과 보호, 대기업의 ‘갑질’에 대한 처벌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범정부 차원의 ‘을지로위원회’를 설치해 납품가 후려치기, 기술 탈취, 부당 내부거래 같은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엄중히 처벌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소상공인 보호를 위해 생계형적합업종 지정 특별법을 제정하겠다는 공약도 실현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중소기업이 회원사인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 중에는 남북 관계가 개선돼 개성공단 가동이 재개되길 바라는 목소리도 많다.
다만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에 대해서는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편의점업체 관계자는 “자영업자인 가맹점주들이 파트타임 고용을 하는데 최저임금을 1만 원 수준으로 맞추면 곧바로 수익 하락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정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으로 단축하자는 등의 정책도 중소기업계가 마냥 반기긴 힘든 상황이다. 대기업 2차 하청업체인 중소기업 A사 대표는 “인건비 부담도 부담이지만 신규 인력 채용이 하늘의 별 따기인데 근로시간 단축이 시행되면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수 kimhs@donga.com·정민지·이샘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