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이유종의 오비추어리]현대 대중음악 새 역사 쓴 ‘시계 수리공’ 카케하시 이쿠타로

입력 | 2017-05-11 11:48:00


출처 : 롤랜드


혁신적인 ‘드럼 머신(드럼 소리를 내는 전자 악기)’을 개발해 현대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끼친 일본 전자악기 제조기업 롤랜드의 창업주 카케하시 이쿠타로(梯郁 太郞)가 4월 1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드럼 머신은 러시아 음향물리학자 레온 테레민 등이 1930년대부터 개발했다. 하지만 일렉트로니카, 댄스, 힙합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계기가 되는 드럼 머신은 롤랜드가 1980년 개발한 드림머신 ‘TR-808’이다. 직원 3000명의 롤랜드는 디지털 피아노, 신디사이저, 키보드, 전기 드럼, 전자 기타 등을 제조하는 대표적인 악기 제조기업이다.

TR-808은 시판 초창기 찬밥 신세였으나 미국의 유명 가수 휘트니 휘스턴, 마돈나 등이 음악에 사용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 초 미국 남부에서 시작된 힙합장르 중 하나인 트랩 음악(Trap music)은 TR-808의 극저음 베이스 드럼이 없으면 만들기 어려울 정도다.

기존 드럼머신은 설정된 리듬을 단순하게 재생했다. 반면 TR-808은 직접 리듬과 사운드를 조작할 수 있어 이후 음악 제작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IBM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 매킨토시, 콤팩트 디스크, 모토로라의 최초 소비자 휴대전화 ‘DynaTAC 8000X’ 등과 함께 인류에 큰 영향을 끼친 전자기기로도 분류된다.


△ 동영상 보기 (https://www.namm.org/library/oral-history/ikutaro-kakehashi)

● 문외한(門外漢)도 다룰 수 있는 악기

1930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카케하시는 어릴 때 양친이 결핵으로 숨져 조부모의 손에서 어렵게 성장했다. 기술학교에 다녔던 그는 2차 세계대전 말 오사카의 히타치조선소에서 견습 학생으로 일하며 군함 건조 등을 볼 수 있었다. 선반 사용, 용접, 조립 등을 경험하면서 제조 분야에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 미군의 폭격으로 오사카 집이 파괴되자 할머니는 친정이 있는 큐슈(九州) 남부로 이사했다. 1946년 그는 오사카현립대에 합격했으나 건강을 이유로 불합격 처리됐다. 1947년에는 규슈에서 시계 수리점을 열었으나 결핵에 걸려 7년 동안 요양원에서 보내야 했다.
카케하시는 오사카로 돌아와 1954년 라디오, 전자 음악기기 등 전자기기 수리점을 열었다.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한편 전자 기기 개발에 매달렸다. 라디오를 수리하며 방송을 자주 들었는데,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매료됐다. 당시에는 라디오 방송도 통제가 심할 때였다. 1958년 그는 이상적인 전자 악기를 개발하는데 투신하기로 했다.

카케하시는 단 한번도 정규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이 때문에 가격이 비싸지 않고 아마추어들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이며 작고 간단한 전자 악기를 추구했다. 이런 생각은 훗날 롤랜드의 기억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1959년 49개 조(調)를 가지며 하나의 음만 내는 첫 악기를 개발했다.

출처 : 위키피디아



● 끊임없는 악기 개발

1960년 카케하시는 음향기기 기업 에이스전기산업을 세우고 전기 드럼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1964년 손으로 조작하는 전기 드럼 ‘R1 리듬 에이스’을 내놓았다. 이 악기는 같은 해 라스베이거스국제음악박람회(NAMM Show)에도 출품했으나 상업 생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967년 그는 자동으로 리듬이 연주되는 전기 드럼을 개발하는 등 혁신적인 전자 악기 개발에 매진했고 지난 반세기 동안 수백 개의 음악 관련 혁신 전자기기를 만들었다.

엔지니어 출신인 카케하시는 기업 경영에는 밝지 못했다. 결국 에이스전기산업의 경영권을 잃었다. 그럼에도 지인들에게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며 1972년 롤랜드를 세웠고 1980년 TR-808 개발을 마쳤다. 1973년에는 음향기기 제조기업인 보스를 설립했고 롤랜드에서 회장, 특임 고문 등을 맡다 2013년 은퇴했다. 이듬해에는 전자악기 회사인 ATV를 세웠다.

그는 전자 악기의 기술 표준화에도 기여했다. 1970년대까지 전자악기 제조 기업들은 각기 전자 악기를 개발했다. 문제는 제조기업들이 서로 호환되지 않는 전자 악기를 제작해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엔지니어 데이브 스미스는 1981년 열린 국제오디오공학회에서 범용적인 통신 표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카케하시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소니와 파나소닉은 수년에 걸쳐 비디오의 표준 기술을 만들려고 경쟁했다. 그 결과 소니가 경쟁에서 밀렸고 사람들은 표준 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했다. 카케하시는 스미스의 경쟁자였지만 1980년대 전자악기와 컴퓨터의 연주 데이터 전송 규격인 ‘미디(MIDI, 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를 개발했다.

● “기존 분야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도한다면 새로운 영역”

카케하시는 확고한 창업 철학을 지녔다. 전통 분야에서 새로운 기업을 일으키는 게 창업이라고 판단했다. 새로운 분야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벤처 기업이라고 봤다. 그는 음악은 벤처 기업의 가능성이 크다고 믿었다. 전자 등을 이용한 기기로 음악가들에게 새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공하는 기업의 요건으로 3가지를 꼽았다. 일단 창업하려면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서 시도해야 한다는 것. 기존 분야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도한다면 새로운 영역으로 판단했다. 대신 인건비 비중이 큰 사업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봤다. 부가 가치가 높은 분야에서 특히 기회가 많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재고가 적은 분야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전자악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봤다. 특히 산업에서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에 음악의 가능성을 믿었다.

대중음악에 대한 카케하시의 기여는 컸다. 2000년 2월 그는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 록 워크에 자신의 손바닥 자국과 서명을 남겼다. 할리우드 록 워크는 로큰롤을 예술로 승화시킨 음악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1985년 1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중심부에 설치된 바닥 동판이다.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 ‘싱어송라이터’ 에릭 클랩튼 등이 여기에 입성했다. 카케하시는 또 미국의 실용음악 명문학교인 버클리음악대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음악은 ‘팬 파이프(길이가 다른 관으로 구성된 전통 악기)’를 가진 양치기처럼 오래된 분야다. 그러나 지금은 우주 시대처럼 새롭다”고 말했다. 카케하시의 기술 혁신은 전통 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