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연희단거리패에 배우로 들어간 김소희는 지금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 연극인의 길을 걷고 있다. 배우로서는 격렬하게, 극단 대표로는 자상하게, 연출가로서는 선명하게, 교수로서는 단호하게 살아가길 원하는 것 같다. 그래도 역시 그는 배우다. 그는 감정 소모가 매우 많거나 극단적인 인물을 자주 연기했다. 그런데도 배역에 완전히 빠지지 않고, 자신을 객관화시킴으로써 관객과 교류할 수 있는 배우를 지향한다. ‘김소희 메소드’라 할 만하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그를 인터뷰하기 전날, 그가 출연하는 ‘초혼’이라는 연극을 봤다. 장일홍이 쓴 ‘이어도로 간 비바리’를 2004년에 이윤택 연출이 재구성해 연출했던 것을 13년 만에 ‘굿과 연극’시리즈(씻김, 오구, 초혼)로 다시 무대에 올린 것이다. ‘초혼’이 ‘굿극’에 들어가는 연유는 제주 4·3사건의 비극과 해원을 제주칠머리 당굿과 교직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출연했던 작품의 DVD를 보고 싶다고 하자 그는 “지금 공연중인 작품이 있는데, 그걸 먼저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당연하다. 그래서 본 게 ‘초혼’이다. 그는 이 연극에서 ‘에미’라는 인물을 연기했는데,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무게 있는 역이었다.
인터뷰를 끝내고도 한동안 기사를 쓰지 못했다. 배우가 배역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듯이 나도 그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체상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때 바람개비가 떠올랐다. 만약 바람개비의 네 날개가 모두 다른 색깔이라면, 그 바람개비는 돌아갈 때 무슨 색깔을 낼까. 그가 갖고 있는 얼굴이, 관객과의 대화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글의 실마리를 찾는 데 애를 먹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우선 바람개비를 세워놓고 각각의 색깔을 설명할 수밖에.
그는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배우이자, 대표, 연출가로 일하고 있고, 후학을 양성하는 교수 직함도 갖고 있다. 일인다역으로 살고 있는 그는 김소희(47)다. 5월 4일 동아일보에서 그를 만났다.
2008년 ‘원전유서’에서 어진네 역을 맡았을 때.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이 지번(地番)을 요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도록 만드는 4시간 반짜리 대작이다. 어진네는 남편한테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심하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 질긴 인생을 연기했다. 김소희가 연기상을 받는 등 이 작품은 그해 동아연극상 대상, 연출상, 희곡상, 무대미술·기술상 등 5관왕에 올랐다. 연희단거리패 제공
1. 연기하다
13년 만에 같은 역을 맡으면 어떤 느낌이 드나.
“우리는 레퍼토리 극단이라 그런 일이 자주 있다. 물론 전에 못 봤던 것도 보이고, 거리(객관성)도 생기고, 여러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기자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으나, 예술하는 사람들의 개성으로 치부한다(이미 다른 연극인들로부터 비슷한 말을 몇 번 들었다. 무대 위에서 남의 인생을 격렬하게 살다보니, 무대 밑의 생활은 자기 마음대로 조용하게 살고 싶어 하는 배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도 묻는 게 기자다. 조금 전에 ‘거리(객관성)’라는 말을 듣고 준비했던 질문을 했다. 어떤 이는 자기를 잊을 정도로 배역에 몰입을 하는 게 좋다고 하고, 어떤 이는 배역과 거리를 둬야 한다고 말한다.
“같이 간다. 완전히 하나가 아닌 두 자아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연기하는 도중에 관객을 많이 보는 편이다. 가열 3번 관객은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됐을까, 하고. 그러면 인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한다고 하는데, 왜 연기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빠져들기 위해서 연기를 할 수도 있지만, 나는 무대에서 객석을 보고, 생각하고, 구경하는 게 재미있다.”
이 언저리가 김소희의 독특함이다.
“나는 그걸 유체이탈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눈 하나를 머리 위에 달아서 자신을 종일 관찰하는 거다. 내가 어떻게 걷는지, 어떻게 바라보고 대화하는지, 전체 그림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관찰한다. 그것이 익숙해지면 무대에서 연기하는 자신을 관찰하는 시야가 생긴다.”(월간 한국연극, 2013년 8월호)
그를 얘기하며 배역의 특성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동안 와, 이게 뭐지, 나랑 다른데, 하는 배역을 많이 맡았다. 그런데 그 배역들이 나중에 보면 다른 여배우들이 꼭 하고 싶어 하는 역할들이었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이나 체호프 작품 등등. 대부분 진하고, 깊고, 기가 막히고,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대단히 큰 고통을 겪는 쎈 역할? 나는 심심하고 평범하게 살았는데 역할은 반대로 극단(極端)의 경험까지 내몰리는 것이어서 나와 배역이 멀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호평을 받는다. 배우 김소희와 배역 사이에 뭐가 있나.
“듣는 능력이 있다, 남의 의견을. 다른 사람 이야기, 힘들어하는 이야기,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몸이 반응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배역의 힌트를 준다. 한번도 ‘이 배역을 맡고 싶다’고 한 적이 없다. 연희단거리패는 다른 극단과 달라서 먼저 뭘 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역할의 배분은 항상 우연히 이뤄진다. 그러나 하다보면 슬금슬금 그 배역을 알게 된다.”
그의 배우관을 설명하는 말 중의 하나가 ‘도구’라는 것이다.
그는 “연극에 입문할 때 ‘특별한 예술가의 특별한 도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거나 “좋은 배우는 연극이라는 전체에 최상의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배우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른 인생을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라는 말도 했다. 남들이 ‘도구’라고 하면 기분이 언짢을지 모르지만, 본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배우에 대한 엄격한 역할 규정이자 프로의식의 발로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는 대단히 성공한 배우다. 많은 연출가들이 그를 ‘도구’로 쓰고 싶어 하니까.
그는 영화에도 몇 편 출연했다. 2013년 영화 ‘파스카’(안선경 감독)에서는 스무 살 연하의 남자를 사랑하는 ‘가을’역을 맡아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본인이 꼭 안 해도 될 것 같으면 거절한다고 한다.
“아는 PD가 방송에 나가라, 2,3년만 하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하루하루도 중요한데, 2,3년은 내겐 대단히 중요하다. 나이와 조건을 따져 저 정도면 김소희가 할만하다고 해서 청하는 일은 안 한다. 전단의 문구를 고치는 일일지라도 나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그게 더 중요하다.”
그러는 그가 6월에 세 자매 얘기를 다루는 독립영화에 출연한다. 감독이 자기 공연을 보고 “선생님이 꼭 출연해 주면 좋겠다”고 해서 맡게 됐다고 한다. 아, 나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구나, 하는 진심이 느껴졌다는 얘기다.
그의 연기는 상으로도 보상받았다.
1998년 ‘느낌, 극락같은’으로 서울국제연극제 신인상을 받았고, 2006년 동아연극상 신인상(아름다운 남자), 2008년 대한민국 연극대상 여자연기상과 2009년 동아연극상 연기상(원전유서)을 받았다. 2012년 아름다운 예술인상(고곤의 선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2013년 김동훈연극상, 같은 해 대구단편영화제 연기상(영화 춘정)을 받은 뒤 2014년 다시 동아연극상 연기상(혜경궁 홍씨)을 받는다.
장 주네 원작의 ‘하녀들’에서 마담역을 맡은 김소희(사진 가운데). 그는 2002년에는 하녀 쏠랑쥬 역을 연기했으나 2009년 이후에는 마담역을 맡고 있다. 2009년 동아일보 연극담당기자였던 권재현 기자는 이 작품에 대해 “삶이 곧 연기이고 연극이 곧 진실임을 보여줌으로써 연극의 마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김소희는 하녀들이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간교하고 퇴폐적인 마담을 연기한다. 연희단거리패 제공
2. 생활하다
그를 말하며 연희단거리패를 빼놓을 수 없다. 연희단거리패가 곧 그이기 때문이다.
연희단거리패는 이윤택 연출가가 1986년 부산에서 ‘가마골 소극장’을 만들면서 꾸린 연극집단이다. 극단이라고 하지 않고 일부러 연극집단이라고 한 것은 단원들이 언제라도 연극을 할 수 있도록,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공동체를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1999년에 문을 연 밀양연극촌이다. 김소희는 1994년 연희단거리패가 서울에 만든 배우양성소 ‘우리극연구소’에 1기로 입소했다. 연세대 88학번으로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연극에 뜻을 뒀을 때의 일이다. 그는 최근의 ‘초혼’까지 70편(재공연 포함)의 연극에 출연하며 이제는 ‘국보급’이라는 말까지 듣는 배우로 성장했다.
인간이 파편화하는 이 세상에 구태여 함께 생활하는 연극집단이 필요한가.
“나는 거꾸로 왜 그렇게 안 사는지 묻고 싶다. 삶과 연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3,4시간 함께 공연하고 헤어지고, 어디 갔다 와서 다시 공연하는 게 과연 옳은가. 정말로 하루 종일 진하게 연극을 하는 세상에 살고 싶었다. 밀양연극촌을 통해 그런 시간을 지내다보니 삶과 연극이 묵직한 비중으로 만나게 되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았으면 집에 가서 쉬었을 텐데, 그게 재미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을 건성으로 아는 것보다 한 사람을 더 진하게, 더 다이내믹하게 아는 게 나는 좋다.”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은 밀양연극촌에서 생활이 연극이고, 연극이 생활인 시간을 보내다가 공연이 있으면 서울과 부산 등으로 나온다. 현재 식구는 80명 정도이고, 서울 수유리에는 40여명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숙소도 있다. 단원들에게는 각자의 경력에 맞춰 적긴 하지만 개런티를 지급하고 있다. 2009년에는 밀양연극촌보다 더 조용한 김해 ‘도요’라는 곳에 새로운 연습실까지 만들었다.
연희단거리패와 밀양연극촌은 한국 연극에서 어떤 의미인가.
“일본 도쿄대에서 우리를 연구하러 왔다가 ‘이상적인 연극 공동체’라고 평가했다. 예전부터 비슷한 시도를 한 사람은 많았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개인 욕망이 방해를 하고,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해서다. 지난해 4월 16일 대학로 게릴라극장 폐관식 때 연극인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모두들 많이 울었다. 김윤철 연출은 ‘지난 30년간 이윤택과 연희단거리패가 없었다면 한국 연극은 얼마나 심심했을까’라고 했다.” 연희단거리패는 앞으로도 한국연극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도할 집단이자, 연극과 배우를 둘 다 살리기 위한 전문적이고 이상적인 공동체라는 자부심이다.
그는 “인간 사회가 파편화되어 간다고는 하지만, 내가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게 진정한 삶”이라고 말한다.
2006년 연희단거리패가 대학로에 문을 연 게릴라극장은 연희단거리패 뿐만 아니라 다른 극단들에게도 든든한 창작산실이었다. 지원금 부족으로 지난해 문을 닫았지만, 김소희는 게릴라극장을 ‘공적 재산’으로 이해한다(폐관 과장에서 극단이 블랙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에 지원이 끊겼다는 말이 나왔다).
“연희단거리패는 대출을 받아 게릴라극장을 지은 뒤 극단이 받는 ‘공간지원금’을 모두 극장에 쏟아 부었다. 그런데 공간지원금제도가 사라졌다. 폐관 과정에서 블랙리스트 운운하는 말이 나온 건 (한국으로서는) 창피한 일이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폐관했다기보다 30스튜디오를 지을 때부터 게릴라극장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면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 비용을 줄이고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게릴라극장은 우리가 만들었지만, 여러 사람이 많이 좋아해주면 공적인 공간이 된다는 걸 보여줬다. 30스튜디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희단거리패는 게릴라극장 부지를 팔고, 지난해 10월 성균관대 쪽에 ‘30스튜디오’라는 극장을 새로 지어 개관했다. 30(삼공)은 연희단거리패 창단 30주년을 의미한다.
“30스튜디오도 객석은 줄이고, 무대는 넓혔다. 그러면 어떻게 수지를 맞추느냐고 하는데, 나는 70석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게릴라극장 시절에는 관객들이 쉴 데가 없어서 겨울에는 스토브를 틀고, 비가 오면 비닐을 쳤다. 30스튜디오는 개막 전에 쉬고, 공부하고, 얘기하고, 공연이 끝나면 연극을 주제로 수다도 떨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대학로에서 밀려났다고 하지만, 나름의 선택도 있었다. 관객과 다른 방법으로 만나고 싶다는 뜻에서.”
밀양연극촌이 2001년부터 시작해 매년 개최하고 있는 밀양여름연극축제는 연희단거리패의 열정과 수준 높은 관객과의 만남으로 이제는 유명축제가 됐다(올해는 7월 26일부터 8월 6일까지, http://www.stt1986.com, 055-355-2308).
3.대표하다
김소희는 2008년 이후 연희단거리패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 전에 정동숙, 남미정 배우가 2년씩 맡았고, 그가 맡을 때도 ‘2년 룰’이 있었으나 그 룰은 현재 작동되지 않고 있다. 김소희가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자리가 힘들어서 탐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물었다. 대충 그렇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신체적으로 통증을 잘 견디는 타입이다. 피곤도 잘 못 느끼고. (강인하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고. 내가 제일 적당한 포지션에 있고, 당분간 내가 하는 게 낫겠다는 무언의 합의 같은 게 있다. 이윤택 선생도 ‘너는 좀 대의를 위하거나 몸을 던지는 쪽을 좋아하니까, 대표를 맡는 게 좋겠다. 배우로 많이 겪어보는 것도 괜찮지만, 대표도 의미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동의했다. 나는 ‘의미’에 움직이는 편이다.”
대표가 된 뒤, 배우는 보지 못하는 뭔가가 보이나.
“무대 위가 아니라 일상과 관련된 것, 다른 사람과 만났을 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돈의 문제라든가, 관객 유치라든가.”
여러 명이 함께 생활하다보면 갈등 같은 게 없을 수 없다. 대표로서 그런 일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했다.
“물론 다툼도, 화해도, 애정도 있다. 자매처럼 지내는 사람도 있고. 전통적인 의미에서 엄마의 역할을 요구받지만, 요즘에는 아빠의 역할도 해 달라고 한다. (힘들지 않은가.) 순간적으로 힘들다는 생각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힘들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시스템은 다른 곳과는 다르다. 우리 대표는 회사의 오너가 아니다. 공무원도 아니다. 우리는 그런 걸 경계한다. 시스템이란, 여러 명이 있으니 질서와 약속이 필요하다는 정도의 의미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내가 대표고, 그 밑에 누구누구를 두고 이런 시스템이 아니다. 이윤택 선생도 있고, 또래 동료들도 있다. 그들은 모두 각 분야의 전문가 수준이다. 그들의 의견을 잘 들어 업무조율을 하면 된다. 이윤택 선생은 강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우리의 옛날을 아시는 분들은 요즘 극단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말한다.”
2014년 ‘혜경궁 홍씨’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김소희. 그는 비극적 인생의 대표격인 혜경궁 홍씨의 심정을 창자를 쥐어짜는 듯한 연기로 표현해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이 작품은 이듬해 134분짜리 영화로도 만들어져 관심을 끌었다. 이른바 ‘연극의 영화화’라는 의미에서 DnC(Drama&Cinema) Live로 불렸다. 기록용 필름은 객석에서 촬영하지만, DnC는 무대 위로 카메라를 올려 보내 배우들의 표정까지 잡아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국립극단 제공
4.가르치다
그는 한때 성균관대, 동국대, 단국대, 용인대, 영산대, 경기대, 중앙대 등에서 연기를 가르쳤다. 지금도 우리극연구소의 강사로, 호원대 공연미디어학부 조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그는 동국대 대학원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후배들에게 가장 강조하고 있는 말이 있다면.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 아니라 선택하는 직업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선택 당하지 않고 선택을 하려면 일상이 피곤해야 한다. 부지런해야 하고, 매일매일 깨어있어야 하고.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결과가 오겠지, 미리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 일단 다 주고, 그리고 뭐가 오는지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니까 금방 초조해지는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그랬다. 연기라는 재미는 내 마음대로 못 산다. 관객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자본의 논리로는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열심히 했는데도 보상받지 못하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타인에게 그 보상이 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 게 재미있다.”
그는 관객의 관계를, 특히 중시한다.
“배우는, 관객이 저 배우가 무대에 서니까 좋구나, 저 배우가 무대에 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 대사는 한번 하면 이미 배우를 떠난 것이다. 공기 중으로 떠난 대사는 관객이 받는다. 어떻게 받았는지 보는 게 엄청나게 재미있다.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고) 관객의 시간을 빼앗는 건 죄다.”
그는 “내가 했다고 해서 말이 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들을 때 그 때 비로소 말이 된다”고 말한다. 본인이 그걸 실천하려해서일까, 그는 대사전달력이 좋은 배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최고의 직업이 배우인데, 배우 중에서도 연극배우가 최고라고 했다.
“왜냐 하면, 내적 성장을 하니까. 책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생각을 한다는 것, 그래서 타인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은 내적으로 나를 성장하게 만든다. 영화, TV, 드라마는 자본에 좌우된다. 연극배우는 온몸으로 관객과 만나며 소통하면서 성장한다. 그걸 매번 확인할 수 있다.”
‘김소희 선생님’은 후배들을 기르며 ‘몸’을 많이 얘기한다. 몸만이 아니라 몸과 공간과의 관계도 강조한다.
“보통 외국 사람들이 우리 공연을 볼 때 하는 말이 ‘에너지’예요. 우리는 몸의 형태뿐만 아니라 소리가 공간에서 어떻게 들리고 끊기며 이용되는지에 대해 많이 배우고, 강조하는 편이예요. 공간과 몸, 공간과 소리, 공간 속에 놓여 있는 자신들을 연계해서 접근하는 거예요. 호흡을 강조해 연기를 조절하고요, 되도록이면 전통적인 색채도 넣으려고 해요.”(뉴스컬처, 2010년 11월)
이게 가능한 게 공동체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연희단거리패는 축적된 네트워크를 활용해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빙해서 무용이나 음악 등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연희단 거리패만의 ‘연기 메소드’에 숨, 호흡, 파장, 리듬, 공간, 공감, 공기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몸’은 연기의 도구만이 아니다.
“극단 구호가 ‘매일 꿈 꿔라, 매일 일하라’이다. 여기서 일은 연기연습뿐만 아니라 몸을 써서 직접 일하는 것도 포함된다. 30스튜디오는 전문기술이 필요한 곳을 빼고는 단원들이 모두 직접 만들었다. 부산에 새로 만들어 5월 말에 개관하는 가마골극장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수공업적이다. 주류와는 다른 방법을 취한다.”
밀양연극촌 상황실에는 ‘연극하는 인간, 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라는 글도 걸려 있다. 혼자 우수한 개인보다 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하는 인간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연희단거리패의 이런 모토를 이해해야 김소희가 연기의 과정을 종종 ‘수행’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2016년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에서 김소희는 여주인공인 라네프스카야 역을 맡았다. 지주의 시대가 저물어가며 경매에 내놓은 ‘벚꽃동산’을 농노의 아들이 낙찰받았다는 사실을 듣고 슬퍼하는 라네프스카야를 딸이 위로하는 장면이다. 라네프스카야가 슬퍼한 것은 ‘벚꽃동산’이라는 재산도 재산이지만,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그 무엇’에 대한 정서적 아픔이라는 해석이 많다. 라네프스카야는 여배우들이 꼭 한번 해보길 원하는 역 중의 하나다. 연희단거리패 제공
5.해석하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나온 ‘연극은 정치적’이라는 말을 더 들어보자.
“그렇다. 연극은 정치적이다. 다만 계파는 없다.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사회적 비판 기능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사회가 한쪽으로 가다보면 고이게 마련이다. 주류라는 것이 좋은 점도 있지만, 생각해봐야 하는 대목도 생기지 않겠는가. 흘러가다가 멈추고, 멈춰 서서 깊이 생각하는 게 연극이다. 연기자는 일상의 시간을 배반하는 사람이다. 중요한 순간은 더 깊고 길게 보고, 그렇지 않은 시간은 버릴 수도 있다. 50년 전과 2017년과 내년에 올리는 연극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연극의 본래 기능이고, 그래야 건강하다. 연극은 문제제기를 고급스럽게, 격조 있게 할 수 있다.”
이런 시각은 ‘연출가 김소희’의 시각이기도 하다.
그는 2013년 ‘오레스테스 3부작’을 공동연출 한 뒤 2015년 ‘갈매기’를 처음으로 단독 연출했다. 지난해에는 창작극 ‘두개의 달’을 연출하면서 연출가로서의 역량과 영역을 점차 키워가고 있다.
연출가의 입장에서 배우를 보니 어떤가.
“연기를 할 때도 바깥을 많이 보는 배우였다. 그러면서 막연히 ‘연출은 외롭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정말 그렇더라. 배우들은 연출가에게 모든 답을 요구한다. 배우는 인간을 연기한다. 발, 내장 등을 현미경으로 보듯이. 그런데 연출은 인간을 거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부수적인 것들, 무대나 조명 같은 것 등 다른 요소를 집어넣는다. 배우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재미있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다.”
그의 모습에 끌려 가족까지 연희단거리패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2남 2녀 중 밑에서 두 번째인데, 막내인 남동생(김철영·45)이 2005년부터 밀양연극촌에 들어와 배우로 일하다 지금은 주로 연극축제를 담당하고 있다. 김소희는 “우리 가족들은 현실적인 얘기를 잘 못하는 몽상가들이다. 동생도 직업을 잡는데 그런 고민을 하는 것 같아 연극촌으로 들어오라고 했다”고 한다.
지난 2월에는 오빠의 1남2녀 중 차녀(김세연)가 우리극연구소 24기로 들어왔다. 계명대에서 한국문화정보학을 전공하고 있는 조카는 대학 4년을 휴학하고 배우의 길을 모색중이다. 주변에서는 “세연이가 하는 짓이 소희 고모의 어릴 때 모습과 똑같다”고 하니, 혹시 ‘김소희 주니어’가 등장할 지도 모르겠다.
가족 얘기를 조금 길게 한 이유가 있다. 기자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누가 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갖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됐다. 간단하다. 피붙이가 자기와 같은 직업을 갖거나 잇거나 할 때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다.
김소희가 여러 얼굴을 가졌다 해도, 역시 그의 정체성은 배우에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배우 김소희에 대한 천착이 모자란 듯하다. 그 미안함을 어느 연극평론가의 글로 대신하고자 한다. 2012년 ‘고곤의 선물’(구태환 연출)에서 김소희의 연기를 보고 연극평론가 백승무 씨가 쓴 글이다. 제목이 ‘한 여배우를 위한 찬가’이니 미안함을 흐리는 데는 딱 좋을 것 같다.
“…그녀는 현실을 능가하는 비사실적 리얼리티, 자연을 능가하는 부자연스러움의 천연성을 가능하게 한다. 연극의 성패는 극장에 진입한 관객들이 얼마나 빠르고 단호하게 삶의 리듬을 버리고 무대 현실의 리듬 속으로 편입되는가에 달려있다.…그녀의 발성과 시선처리, 상대역과의 호흡, 관객과의 교호(reaction) 등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이르는 세세한 움직임에는 특유의 리듬이 있다.…그녀는 연출술이라는 추상적 언표체계를 예술적 기호로 번역하는 무대 확성기이다.…이 광활한 진폭이 복잡한 알레고리와 심오한 철학적 사변으로 가득 찬 ‘고곤의 선물’의 난해함을 극복하게 만든 원동력이다. 이것이 괴짜 에드워드의 횡포에 억눌려 여태 제대로 기를 펴보지 못했던 헬렌을 드디어 이 극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만든 뚝심이다. 구태환의 ‘고곤의 선물’이 그녀에 와서야 별 다섯 개에 상응하는 완성도를 누리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느 배우가 또 이런 찬사를 받을 수 있을까. 여담. 이 글이 어렵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연극평론 중에는 쉬운 편에 속한다. 이 글을 이윤택 연출과 김소희는 연희단거리패가 추구하는 ‘연기 메소드’를 정확히 이해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단원 전원이 읽어보라고 했단다. 이 글에 김소희가 말한 연기술과 관객과의 관계를 말하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다.
(김소희가 출연한 주요 연극은 다음과 같다. ‘미친 동물의 역사’ ‘햄릿’ ‘느낌, 극락같은’ ‘오구’ ‘어머니’ ‘일식’ ‘봄날은 간다’ ‘시골선비 조남명’ ‘하녀들’ ‘오이디푸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서울시민 1919’ ‘리어왕’ ‘길’ ‘곡예사의 첫 사랑’ ‘초혼’ ‘떼도적’ ‘오월의 신부’ ‘아름다운 남자’ ‘바보각시’ ‘이아고와 오셀로’ ‘억척엄마와 그 자식들’ ‘피의 결혼’ ‘원전유서’ ‘갈매기’ ‘베니스의 상인’ ‘경성스타’ ‘맥베스’ ‘고곤의 선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혜경궁 홍씨’ ‘길 떠나는 가족’ ‘벚꽃동산’ ‘황혼’ 등)
심규선 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