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헤이그 시청사 외벽에 등장한 몬드리안 추상화. 사진 출처 www.theguardian.com
1911년 프랑스로 간 미술가는 다양한 당대 미술을 두루 만났습니다. 신인상주의와 표현주의 야수파를 접하며 조형적 변화도 있었습니다. 특히 큰 영향을 받았던 입체파를 따라 대상을 선과 면으로 해체한 후 여러 시점으로 재구성을 시도했지요. 반면에 그들과 달리 화면에서 입체감을 덜어내고 평면성을 강화해 독자성도 인정받았어요.
1914년 화가는 예술 무대를 다시 고국으로 옮겼습니다. 병중이던 아버지를 뵈러 일시 귀국했다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했거든요. 이곳에서도 의미 있는 예술 행보는 계속되었습니다. 1917년 테오 판 두스뷔르흐와 전위적 예술 잡지 ‘더 스테일’을 창간한 일도 그중 하나였어요. 네덜란드어로 ‘양식’을 뜻하는 정기 간행물은 1931년까지 발간되었습니다. 미술과 건축, 문학과 영화, 출판과 디자인 등 다양한 면면의 몇몇 기고가는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미학적 지향만은 같았습니다. 절제된 예술로 우주 질서에 내재된 보편적 미에 닿고자 했지요.
화가 그림이 네덜란드 헤이그 시청사 외벽에 등장했습니다. 하얀 건물을 캔버스 삼아 솟은 검은 수직선과 창문 옆으로 이어지는 굵은 수평선이 산뜻한 삼원색 면과 어우러져 이색적인 회화가 탄생했지요. ‘세계에서 가장 큰 몬드리안의 그림’으로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은 더 스테일을 기념하고자 했답니다. 소식을 접하며 새롭게 다시 호출된 듯했습니다. 차이와 차별이 초래할 비극을 수직적 ‘만남들’로 해소하며 평등한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미술가의 꿈, 우리의 유토피아 말입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