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아이들]<상>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버림받은 아이들’ 보호소에 갇힌 18세 페버 이 악물고 공부해 자격증 3개… 가족들 생계 위해 공장 취업 천식 심해져 숨쉬기 어려울 때도 전문가 “약자 구제 절차 마련해야”
미등록 청소년인 페버 군(18·위쪽 사진 뒷줄 오른쪽)은 고교 졸업 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충북의 한 공장에서 두 달간 일하던 중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불법취업 단속에 걸렸다. 그에겐 엄마와 한 살 위 누나 그리고 초등학생과 중학생인 동생 3명이 있다. 아래쪽 사진은 페버군이 변호사를 통해 보내온 자필 편지. 그는 “피부색만 다를 뿐 토종 한국인”이라며 도움을 호소했다. 페버 가족 제공
지난달 13일 충북 청주의 한 공장에 승합차 여러 대가 들이닥치자 외국인 근로자들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공장 뒷문에서 일하던 페버 군(18)은 승합차를 보자 온몸이 얼어붙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을 뒤로하고 냅다 달리다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날 잡으러 왔어. 지금 도망치고 있어!”
○ 미등록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죄
엄마는 강하게 마음을 먹고 호랑이 굴로 들어가듯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았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애쓴 결과 자신은 일시적 체류 허가를 받고 다섯 남매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국내에 체류하도록 허가받았다. 페버 군 가족은 이웃의 후원금을 받아 근근이 먹고살았다. 페버 군이 다니던 서울 이태원의 한 초등학교 여교사 A 씨는 “남매들이 학교 수돗물로 배를 채우곤 했다. 예의 바르고 반듯해 사람들이 매달 30만 원씩 모금해 도와줬다”고 말했다.
페버 군은 가족을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고교 3학년 때 친구인 박모 씨(19)는 “페버가 자격증 시험공부를 할 때 이해를 제대로 못 해 친구들이 놀렸지만 결국 자격증을 3개나 땄다. 돈을 벌어 동생들에게 맛있는 걸 사주고 싶다고 했다”고 전했다.
○ 출산하느라 비자 연장 못 한 미혼모
미등록 이주민들은 한국이 너무 쉽게 불법 체류자 낙인을 찍는다고 하소연한다. 모국 케냐와 무역 사업을 하는 커리어우먼을 꿈꾸며 7년 전 한국에 온 제니퍼(가명·32) 씨도 그중 한 명이다. 한국에서 경영학 석사를 끝내고 구직비자를 받은 그는 지난해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한국에 유학 온 케냐인 엘리트란 자부심이 컸다. 하지만 갑자기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게 됐고 남자친구는 홀연히 모국으로 떠나 버렸다. 낯선 한국에서 홀로 출산하고 몸조리하느라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구직비자는 만료가 됐고 미혼모에 불법체류자란 딱지까지 붙었다.
애를 맡길 곳이 없어 불법 취업도 못하니 생계가 힘들어진 제니퍼 씨는 모든 것을 합법으로 되돌려 놓기로 마음먹었다.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아이를 한국에 두고 케냐로 돌아가 한국대사관에서 새 유학비자를 받고 아들 출생신고도 마쳤다. 합법 외국인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들은 여전히 미등록 아동이다. 아들을 외국인으로 등록하려면 그간 불법 체류에 대한 과태료 100만 원을 내야 하기 때문. 기부금에만 기대 사는 제니퍼 씨는 과태료를 낼 수가 없다. 이주민센터 ‘친구’의 조영관 변호사는 “미혼모 외국인들은 출산 과정에서 비자를 연장하기 힘들어 쉽게 불법 체류자가 된다. 이런 약자를 구제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 부모의 ‘위장결혼’에 국적 잃는 소녀
미연이의 자문역을 맡고 있는 변호사는 “불법을 저지른 부모는 당연히 처벌받아야겠지만 부모에게 이용당한 아이는 보호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은아 achim@donga.com / 청주=노지원 / 김예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