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언급할 때가 그렇다. 눈은 살짝 찡그린 채 옅은 미소로 입을 삐쭉 내밀고 말한다. “공짜 안보는 없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최악”이라고…. 보호나 받는 주제에 단물만 빨아먹고 있다는 뉘앙스다. 대단한 약점이라도 잡고 있다는 듯 ‘까불면 재미없다’는 식의 협박 투까지 섞인다.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에 한국은 호구(虎口)가 잡혔다. 호랑이 입에 들어간 신세…. 합의 같은 건 모르겠고, 사드 비용을 내라고 생떼를 쓰는 건 한국이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 잘 보여준다. 필리핀의 독재자 두테르테에겐 비위나 맞추면서 한국에는 함부로 해도 뒤탈이 없다는 식이다. 워싱턴포스트가 “외교적 무례에도 한국이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썼을 정도다.
트럼프는 국내 정치에서 까먹은 점수를 해외에서 따려고 한다. 언론은 러시아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그를 탄핵으로 몰고 갈 기세고, 지지율도 38%(15일 갤럽)까지 떨어졌다. 내년 중간선거를 앞둔 공화당도 여차하면 삐딱선을 탈 분위기다. 시리아 공습과 대북 군사압박으로 재미 좀 보더니 피를 나눈 혈맹인 우리까지 함부로 대하고 있다.
트럼프가 야당과 주류 언론으로부터 “비열하다”는 소릴 자주 듣는 건 장사꾼 기질 탓이다. 툭하면 남 탓에, 상대 약점을 물고 늘어져 원하는 걸 얻는다. 말이 좋아 협상 전략이지 정의를 추구한다는 미국의 리더답지 못한 행동이다. 트럼프의 욕심은 양심보다 쉽게 상처받는 모양이다.
제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에는 과잉 친절을 베푼다. 아베 신조 총리를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지인 결혼식에 데려간 건 볼썽사나운 일이었다. 미일동맹만 굳건하면 한미동맹은 대강 해도 된다는 걸까.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선임연구원은 “미국이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허용해 동북아 지역에서 더 많은 안보 역할을 맡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주 만난 한반도 전문가는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에 대해 “트럼프가 김정은보다 정상일 거라고 믿지 말라”고 말했다. 지상군을 북한의 볼모로 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시킬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문재인 정부에 트럼프 시대는 외교적 재앙이 될 가능성이 있다. 다음달 말로 잡힌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분명 민낯을 드러낼 것이다. “위대한 동맹” 한마디 하곤 곧장 청구서를 내밀 가능성이 높다. 들어주면 ‘등신외교’ 소리 듣고, 안 들어주면 “친북 좌파가 한미동맹 망친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진보는 북한을, 보수는 한미동맹을 낭만으로 바라본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은 이제 과거의 미국이 아니다. 그래서 보수도 낭만을 걷어내야 한다. 정치권도 함부로 한미 외교를 정쟁거리로 삼아선 안 된다. 지금은 정부가 국익만 생각하며 대응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한번 호구 잡히면 영원히 호구 된다.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