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형 국제부 기자
‘참깨’란 뜻을 지닌 세서미는 유럽 국가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를 벤치마킹했다. 중동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전 세계 유명 과학자들이 다양한 연구 활동을 진행할 예정이다. 세서미의 최고책임자는 CERN 소장을 지낸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물리학 석학 크리스 루엘린 스미스 박사다. 그는 개소식에서 “이미 55개의 연구 과제가 신청됐고, 다양한 배경의 연구진이 조화롭게 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기술계에서는 세서미가 최첨단 연구와는 거리가 멀었던 중동에 새로운 자극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세서미가 지니는 과학기술적 성과 못지않게 정치적 의미가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요르단 이란 이스라엘 이집트 파키스탄 팔레스타인 터키 키프로스같이 적대적 관계를 유지해 온 나라들이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란, 팔레스타인과 앙숙이다. 아랍권 대표 주자 중 하나인 이집트 역시 페르시아의 후예인 이란과 지역 패권을 놓고 경쟁할 수밖에 없다. 키프로스와 터키도 불편한 사이다.
종교와 인종의 차이, 자원과 영토 때문에 끊임없이 피를 흘려온 중동 국가들이 장기적인 교류·협력과 투자가 필수인 과학기술 분야에서 손을 잡은 건 파격적이다. 중동 역사에서 세서미처럼 종교, 인종, 문화의 벽을 넘어선 대규모 협력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없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세서미 프로젝트는 1999년부터 추진됐다. 그러나 각국 간에 크고 작은 갈등과 재정 확보 문제 등으로 계속 지연됐다. 특히 2010년 이란의 저명한 핵 과학자들이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땐 큰 위기를 맞았다. 2013년에는 공사 중이던 연구소 지붕이 무너지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문을 열었기에 세서미가 단순한 보여 주기용 프로젝트는 아니라는 주장에 더욱 힘이 실린다.
세서미에는 주요 7개국(G7)과 중국, 러시아는 물론이고 스웨덴, 스위스, 포르투갈, 브라질 등이 ‘옵서버 국가’로 이름을 올렸다. 세계 10위권 경제 과학 대국인 한국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지만 곧 그렇게 되길 바란다.
한국의 참여는 그 자체로 중동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보여 주는 것이 된다. 평화를 갈망하는 나라라는 점에서도 세서미같이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프로젝트에 참여할 명분이 충분하다. 향후 북한이 개혁과 개방을 선택해 국제사회의 건전한 일원이 되기로 결심하는 경우 세서미 같은 과학기술 남북 협력 프로젝트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세형 국제부 기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