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텔레비전이 배달돼 오기 전에 어머니와 오랜만에 작은방 청소를 했다. 지금은 어머니가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둘째 동생 방이었다. 그 동생이 직장 다닐 때 공부하던 책들과 이런저런 서류뭉치를 내놓으려는데 빈 엽서 한 장이 가볍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용하지 않은 관제엽서였다. 현재 순화어로는 체신엽서. 그래도 누렇게 변색돼 보여서 버릴까 하다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우표란에 쓰인 금액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올해 체신엽서 가격이 300원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70원이라면, 대체 그 시절은 언제였을까.
지난 연휴 때 제 부모와 휴가를 다녀온 초등학생 조카가 비밀스럽게 나를 방으로 불렀다. 휴가지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으라고 내가 1만 원쯤 줬는데 그 돈으로 자신을 위해서 좋은 걸 샀다고. 아이는 침대 밑 서랍을 열고는 그 안을 보여주었다. 한 장씩 뜯어서 쓰게 된 분홍색 엽서 묶음과 편지지들이 들어 있었다.
줌파 라히리의 ‘길들지 않은 땅’이라는 단편소설은 여행을 낙으로 삼게 된 아버지가 출가한 딸의 새집을 방문해 일주일 동안 지내는 이야기다. 아내가 죽은 후 아버지가 다시는 “가족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딸 루미는 아버지가 “자기 가족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희미한 불안을 느낀다.
아버지는 방치돼 있던 딸의 뒤뜰을 가꾸기 시작한다. 흙과 퇴비를 사고 아내가 좋아했던 수국도 심고. 어린 손자에게는 심고 싶은 걸 마음껏 심으라고 신문지만 한 땅을 내주었다. 딸은 정원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아버지와 그 곁에서 노는 아들을 보며 깨닫는다. 지금 그 모습이 얼마나 제대로 된 삶인지를. 같이 살자고 말해도 아버지는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한다. 아버지가 떠난 날, 루미는 정원에서 아들이 자신의 땅에 심어둔 것을 본다. 볼펜과 광고지, 그리고 아버지가 그 집에 와서 쓴 엽서 한 장. 예전처럼 자신에게 “행복하길, 사랑을 전하며, 아빠”라고 쓴 게 아니라 여행을 같이 다니게 된 한 부인에게 쓴 엽서. 소설에서 상징(象徵)은 이 엽서같이 의미의 폭을 넓혀 주는 것 같다. 딸은 이윽고 아버지가 하지 못하고 돌아간 일을 한다. 엽서에 묻은 흙을 떨어내고 우표를 붙이는.
내 책상 서랍 하나는 여러 도시의 미술관, 서점, 거리에서 산 각종 엽서들로 가득하다. 산마르코 광장의 흑백 엽서는 베네치아에서의 추웠던 이틀을, 카라바조의 그림이 새겨진 엽서는 우피치 미술관에서 보낸 시간을, 코르크로 만들어진 리스본의 엽서는 그걸 선물로 사다준 친구를 떠올리게 한다. 사물 중에는 그저 보기만 해도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것들이 있지 않나. 기념품이나 일기장처럼. 때에 따라 크기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엽서 또한 그런 힘센 사물이 아닐까.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