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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기자의 글로벌 이슈&]넷플릭스가 칸 영화제에 간 까닭

입력 | 2017-05-29 03:00:00


미국의 온라인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는 고화질 동영상을 끊김 없이 전송할 수 있는 압축 기술, 자체 제작 콘텐츠,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한 추천 서비스 등으로 세계 시장을 이끌고 있다. 넷플릭스가 자체 제작한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시즌5 예고 포스터. 사진 출처 하우스 오브 카드 공식 트위터

박용 기자

내일 미국에 ‘새 대통령’이 등장한다면…. 물론 ‘러시아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갑자기 물러난다는 얘긴 아니다. 30일 미국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인 넷플릭스(Netflix)에서 공개되는 미드(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 5편에서 주인공 프랜시스 언더우드가 드디어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한다. 전편에서 사퇴한 대통령의 자리를 물려받았던 부통령이 대선을 통해 명실상부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백악관을 무대로 펼쳐지는 막장 권력 게임을 실감나게 그려 에미상과 골든글로브상을 거머쥔 이 작품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즐겨 볼 정도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권력은 부동산과 같아서 핵심에 접근할수록 가치가 높아진다’고 말하며 권력을 향해 돌진하는 언더우드가 트럼프 시대에 어떤 대통령으로 그려질까. 집요하게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고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다면 살인도, 전쟁도 불사하는 이 냉혹한 마키아벨리안 정치인을 현실에 대입해 보는 미국인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언더우드 역을 맡은 배우 케빈 스페이시는 “전작보다 더 소름 끼칠 것”이라며 “드라마를 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이젠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로 여긴다”고 말했다.

잘 만들어진 미드의 대명사인 ‘하우스 오브 카드’의 새 스토리만큼 관심을 끄는 건 이 작품을 제작한 넷플릭스의 존재감이다. 실리콘밸리의 정보기술(IT) 회사가 이런 수작을 제작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하우스 오브 카드’처럼 자체 제작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만 약 300편에 이른다는 사실이 놀랍다. 17일 개막한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넷플릭스 돈으로 만들어진 영화 ‘옥자’와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가 동영상 영화 최초로 경쟁 부문에 오른 것은 이런 선행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전통 영화인들에겐 인터넷을 위해 만들어진 동영상 영화 따위와 경쟁하는 현실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극장협회(FNCF)가 경쟁 부문에 넷플릭스 제작 영화를 포함시킨 칸의 결정에 반발하는 등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저울의 추는 이미 새 시대로 기울고 있다.

시장의 판을 바꾸는 이종(異種) 간 경쟁은 산업계에선 더 흔하다.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창업자는 20여 년 전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린 비디오 연체료에서 창업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연체료 없이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네마 천국’을 꿈꾸며 1997년 정액 회원제 DVD 대여 서비스를 창업했다. 창업 10년이 되던 해인 2007년엔 동영상 스트리밍 시장에 뛰어들었다. 비디오 대여 서비스의 전통 강자인 ‘블록버스터’를 쓰러뜨리고 이제는 전통 영화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업종의 경계를 무너뜨린 넷플릭스는 국경을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자체 제작 콘텐츠와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맞춤형 콘텐츠 추천 서비스를 앞세워 한국을 포함한 세계 190여 개국, 1억 명 가까운 회원에게 서비스를 하고 있다. 넷플릭스를 볼 수 없는 곳은 중국 북한 시리아 등에 불과하다. 이 회사는 마케팅 비용도 미국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쓴다. 지난해 방한한 헤이스팅스 최고경영자(CEO)는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고, 시청자의 콘텐츠 소비 수준이 높은 한국은 우리에게 최적의 시장”이라고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초고속 인터넷을 구축하고도 넷플릭스 같은 서비스 기업을 만들지 못한 한국은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에는 탐나는 시장이다. 제조업을 강타한 세계화와 자동화의 거대한 물결이 한국의 서비스업 일자리까지 야금야금 잠식하는 ‘세계화 2.0’의 시대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23일 열린 동아국제금융포럼에 참석한 앤 크루거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부총재 등 국내외 전문가들의 지적도 비슷하다. 크루거 전 수석부총재는 이날 “한국 경제가 도약하려면 제조업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 서비스업의 생산성부터 높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서비스업 진입 규제를 풀고, 생산성도 높여야 좋은 일자리도 생기고 소득 불평등도 해소될 수 있다는 조언이다. 이성용 전 베인앤드컴퍼니 한국 대표는 “한류 수출을 얘기하지만 변변한 공연장 하나 없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은 영화 한 편 제작하는 데 1500명이 투입되지만 할리우드 대작 영화는 1만 명이 동원된다”고 말했다. 잘 키운 서비스업이 일자리 효자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일자리 상황판엔 이런 변화를 감지하고 관리할 수 있는 지표가 있을까. 칸으로 간 넷플릭스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