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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의 모바일 칼럼] 악역(惡役)의 존재 이유

입력 | 2017-05-30 03:00:00


이진 논설위원

요즘 재계에서 가장 이목이 집중된 사람은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상임부회장일 것이다. 김 부회장이 25일 경총 포럼에서 “사회 각계의 정규직 전환 요구로 기업들이 상당히 힘든 지경이다”라고 말한 것이 계기였다. 그는 “현재의 논란은 비정규직 문제가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문제”라고도 지적했다.

다음날 김 부회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 등으로부터 십자 포화를 방불케 하는 공격을 받았다. 김 자문위원장은 27일에도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큰 기득권은 재벌이다. 재벌들은 편법을 통해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김 부회장이 가볍게 잽을 날리자 정부가 스트레이트와 훅, 어퍼컷을 퍼부은 셈이다.

문재인 정부로서는 김 부회장이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인 일자리 창출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저항한다고 간주한 것 같다. 김 부회장은 노사관계에서 재계를 대표하는 경총의 상임부회장이다. 비정규직 95%가 집중된 중소기업 회원사들의 처지를 알리는 악역을 맡았다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식으로 혼쭐이 나고 말았다.

2006년 개봉된 영화 ‘열혈남아’에서는 심재문(설경구)과 민대식(윤제문)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이 영화를 봤을 때 윤제문의 연기가 인상 깊었다. ‘진짜 조직폭력배가 영화에 출연했나?’라고 착각할 뻔했다. 알고 보니 윤제문은 악역 전문 배우로 이미 이름이 높았다. 같은 해 영화 ‘비열한 거리’가 개봉된 뒤 술집에서 만난 옆 테이블 어깨들로부터 “우리 쪽 일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윤제문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동네 사람들이 동료(?)로 봐줄 정도였다면 악역 배우로는 그만한 칭찬이 없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악역의 역할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주인공은 더 돋보이게 된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플롯이 아니라도 그렇다. 모든 드라마는 갈등이 있고 이를 해소하는 흐름을 따르기 마련이므로 주연에 맞서는 조연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막상 악역을 연기하는 배우는 편치만은 않을 수 있다. 스트레스로 탈모가 왔다거나 어머니가 “너 같은 놈을 아들로 둔 적이 없다”며 집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는 식의 얘기들로 악역 배우가 겪는 어려움을 짐작할 만하다.

다시 김 부회장 얘기로 돌아가자. 그는 ‘재계 노무담당 이사’ 역할을 20년 넘게 해온 전문가다. 새 정부 들어서만 재계를 대변하려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도 아니다.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에 시달린 재계를 위해 “뭘 안 주면 안 줬다고 패고 주면 줬다고 팬다”고 항변한 적도 있다. 미국 조지아대에서 노동경제학 박사를 딴 그는 재계의 단순 대변인이 아니라 이데올로그 역할을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새 정부에서 그의 역할이 패배하는 악역으로 끝날지, 대한민국 전체 노사관계 드라마를 해피엔딩으로 만드는 조연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