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간도참변’ 일제 만행 고발… 한국 언론사 첫 순직기자

입력 | 2017-05-31 03:00:00

장덕준 선생 6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동아일보 논설기자로 1920년 10월 간도참변을 취재하러 갔다가 11월 일본군에 피살된 추송 장덕준 선생. 그해 7월 27일 모습이다. 그는 이 사진을 찍은 뒤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방중한 미국 의원시찰단에게 일본의 불법행위를 설명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추송 장덕준 형은 본사의 특파원으로 작년 10월경에 간도 방면의 험악한 형세를 조사키 위하여 출장하였다가 행방이 불명하여 탐지할 도(道)가 두절되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는 일본 왕실의 ‘3종 신기’를 비판해 정간당했다가 복간되자마자 이튿날(1921년 2월 22일자) 1면 머리기사로 ‘추송 장덕준 형을 사(思)하노라’라는 논설을 실었다.

동아일보 논설기자였던 장덕준 선생(1892∼1920·건국훈장 독립장)은 1920년 10월 ‘간도참변(경신참변)’이 시작되자 이를 취재하기 위해 현지로 떠났다 일본군에 피살됐다. 간도참변은 봉오동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 대패한 일본군이 간도의 독립군 근거지를 파괴하면서 조선인 3700여 명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장 선생은 간도에서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내왔다.(동아일보 1925년 8월 29일자)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는 ‘6월의 독립운동가’로 장덕준 선생을 선정하고 6월 1∼30일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관련 사진 등 추모전시를 연다.

“…밤중이 되어 일본군이 와서 말하기를 상관이 부르니 같이 가자고 하기에 장덕준은 의심이 들어 밤중이니 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일본군은 말(馬)까지 가지고 다시 와서 가자고 강요하여 하는 수 없이 따라간 것인데 그 후로는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일본군은 장덕준을 미워하고 기피하여 그날 밤 밖으로 유인하여 암살한 것이 틀림없다.”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1921년 10월 28일자 기사다. 장 선생의 최후에 대해서는 함경북도 나남의 헌병대장인 스즈키 다케오미(鈴木武臣)가 조선헌병대사령관 마에다 노보루(前田昇)에게 보고한 일본군 측 기록도 있다. “(1920년 11월) 8일 밤 국자가(局子街) 우시장 여인숙 관동여관에 투숙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장덕준으로 사료되는 조선인이 1명 나갔다는데….”

장덕준 선생의 추도회를 보도한 동아일보 1930년 4월 3일자. 동아일보DB

동아일보는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면서 장 선생의 죽음을 인정하고 순직자로 추도식을 거행했다.

장 선생은 황해도 재령군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인촌 김성수 선생과 함께 ‘육영회’(인재 양성을 위해 조선 학생을 외국에 유학시키는 모임) 설립을 추진했고,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한편 황해도로 주금(株金)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창간 뒤에는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직했다.

장 선생은 1920년 4월 2∼13일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이라는 논설로 3·1운동을 왜곡하는 일본 여론을 비판했고, 1920년 6월 5차례에 걸쳐 황해도 평안도 일대의 조선인 차별 현장을 다룬 르포 기사의 필자 ‘삼민생(三民生)’도 장 선생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장 선생의 동생인 설산 장덕수(1894∼1947)는 동아일보 초대 주간을 지냈다.

6월의 독립운동가 공훈 내용을 작성한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당시 동아일보가 정간 중이었으므로 취재를 해도 보도할 지면조차 없는 상태였지만 장 선생은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를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다”며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순직 기자임에도 ‘국자가 관동여관’의 현 위치를 비롯해 마지막 행적이 채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