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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의 워치콘 X]누가 대통령을 노엽게 만들었나

입력 | 2017-06-03 03:00:00


이철희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은 ‘매우 충격적’이라고 말했습니다.”(윤영찬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 아마도 문 대통령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직접적 반응까지 소개한 청와대 브리핑은 취임 이래 처음이 아닐까 싶다. 청와대로선 문 대통령의 ‘격노’를 나름대로 절제된 표현이라며 발표한 것이리라. 이후는 일파만파다. 민정수석비서관실이 곧바로 진상조사에 나섰고, 하극상이니 국기문란이니 후속 반응도 거세다. 당장 집권여당도 국회 청문회를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노무현 스타일의 부활?

충격은 국방부와 군을 더 큰 쇼크로 강타했다. 군인들은 멘붕 상태다. 여파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외교안보 부처는 물론이고 전체 관료사회로 번지고 있다. 둔감한 이들조차 “아, 정권 바뀌었지. 실감나네”라고 토로한다. 청와대가 노린 것은 이런 연쇄효과일지도 모른다. 관료들은 이제 서서히 과거 노무현 정부 스타일의 부활을 예감하는 분위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외교안보 정책에서도 투명성을 매우 강조했다. 정책 결정이 과거 제왕적 권력 시대처럼 밀실에서 비밀스럽게 이뤄져선 안 된다며 민감한 사안도 국민적 공론화를 거치도록 했다. 그리고 국민 여론과 부처 정책을 조정하는 기능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 맡겼다. 당연히 청와대에 힘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문 대통령 인식의 근저에도 그 시절이 깔려 있다. 대선 공약집은 ‘국민외교’를 표방했다. 지난달 주요 국가에 특사를 보내면서도 정치적 정당성과 투명성을 역설했다. 특히 “새 정부는 피플파워를 통해 출범한 정부라는 의미를 강조해 달라”고 주문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새 정부는 과거의 밀실 합의를 재검토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시켜 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투명한 정책 결정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비밀주의에 익숙한 부처의 자율성은 크게 제한당했고 커리어 외교관과 유니폼 군인들에 대한 불신은 커졌다. 그러다 보니 담당 부처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왕따’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여기에 자주파와 동맹파 간 갈등이 겹치면서 청와대마저 이념의 전쟁터가 됐다.

문 대통령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 이 과정을 줄곧 지켜봤다. 특히 민정수석 시절 용산 미군기지 이전 협상을 둘러싸고 거센 갈등이 표출됐을 때 NSC와 국방부, 외교부에 대한 조사 책임을 맡았다. 당시 선혈 낭자한 싸움판 같은 분위기에서도 문 수석은 균형감을 보여줬다는 게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군사전문가 김종대(현 정의당 의원)의 ‘취재 결과’다.

문 수석은 공직기강비서관의 조사 보고를 받은 뒤 서로 상반된 입장을 다시 경청했고, 당초 한쪽 시각에 경도돼 있던 17쪽짜리 보고서를 균형 있게 6쪽으로 요약해 올렸다. 문 수석 보고서에 대한 노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 모르겠다.”(‘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2010년)

‘맹탕 文수석’의 변화?

흥분하지 않고 어디에 쏠리지 않는, 그래서 대통령마저 헷갈려하는 맹탕 보고서를 만든 게 ‘문재인의 성정(性情)’이었다. 그랬던 문 대통령이 노기를 드러냈다. 민정수석실 조사로 어느 쪽 거짓말인지, 아니면 의사소통의 혼선인지는 드러날 것이다. 한데 더 궁금한 게 있다. 과연 무엇이, 누가 문재인의 평정심을 깼는지…. 참모와 대통령은 다르기 때문만일까.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