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황광해의 내가 몰랐던 한식]삼계탕

입력 | 2017-06-07 03:00:00


황광해 음식평론가

내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섯 살 무렵이라고 들었다. 어머니가 전하는 이야기다. 시골집,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아버지는 우물가에서 닭을 손질(?)하고 있다. “닭 잡는 거 굳이 안 봐도 되는데 꼭 옆에 지키고 서서 쳐다보면서 계속 ‘꼬꼬야 아야 한다’라고 울더라고. 그런데 막상 닭죽을 끓여 놓으면 언제 울었는지 잊어버리고 잘만 퍼먹더라.” 여섯 식구였다. 닭 한 마리를 잡아서 온 가족이 두 끼쯤 닭죽을 먹었다.

1970년대 후반, 서울로 유학을 왔다. 어느 날 희한한 말을 들었다. “○○대학 기숙사 식당에서는 일요일 점심 때 삼계탕을 준다더라.” 기숙사 삼계탕? 아무려면 그 귀한 삼계탕을 기숙사 식당에서 막 내놓으랴. 그런데 진짜란다. 마침 그 기숙사에 친구가 있었다. 대학 마크가 새겨진 친구의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를 빌려 입고 그 대학 학생으로 위장했다. 닭 한 마리를 반으로 자른 ‘반계탕(半鷄湯)’이었다.

반계탕은 얼마간 길거리 식당에서 팔더니 어느 순간 어물쩍 자취를 감췄다.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내놓는 삼계탕만 남았다. 닭 한 마리니 양이 넉넉할까? 그렇진 않다. 지금의 삼계탕 닭 한 마리는 기숙사 식당의 반계탕보다 훨씬 작다.

삼계탕은 우리 시대에 등장한 음식이다. 조선 후기 혹은 일제강점기, 닭 국물에 건삼(乾蔘)을 갈아 넣은 삼계탕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억지스럽다. 조선 후기까지도 인삼은 자연산 산삼이었다. 인삼을 인위적으로 재배한 것은 18세기 후반 무렵이다. 1797년 6월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정조가 재배 인삼을 가짜 인삼, 즉 가삼(假蔘)이라 부르며 화를 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19세기부터는 홍삼을 재배한 인삼으로 만들었다.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의 활동 시기는 19세기 초중반이다. 이때도 산삼뿐만 아니라 홍삼조차도 귀했다.

19세기 초반, 귀양살이를 마치고 귀향한 다산 정약용이 먹었다는 닭국은 ‘닭고기 국물에 주사위처럼 네모나게 썬 두부와 닭고기를 넣고 끓인’ 프리미엄 연포탕(軟泡湯)이었다. 연포탕은, 연두부를 끓인 다음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 것이다. 연포탕에 닭고기와 닭고기 국물까지 더했다면 당시로서는 프리미엄급 국물이었을 것이다. 인삼과 닭고기를 넣고 끓인 음식은 보기 힘들었다.

수삼(水蔘)은 유통이 어렵다. 여름철에는 좀이 슬기도 한다. 닭고기도 마찬가지다. 여름철에는 쉽게 상한다. 1960년대 초반 신문에 삼계탕이 등장하는 것은 이 무렵부터 냉장, 냉동 유통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삼계탕의 시작은 백숙(白熟)이다. 백숙은 ‘아무런 양념도 하지 않고 푹 곤 것’이다. 연계증(軟鷄蒸), 즉 영계찜이다. 영계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는 않다. 오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등장하는 영계(英鷄)는 닭 이야기가 아니다. 석영(石英) 모이를 먹은 닭(鷄)이 낳은 달걀 이야기다. 영계가 낳은 달걀이 몸보신에 좋다는 내용이다. 중국 ‘본초강목’의 닭 이야기다. 영계는 원래 없었던 표현이다.

영계는 연계(軟鷄)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조 24년(1800년) 5월, 예조판서 서용보의 보고문이다. “생계(生鷄) 세 종류는, 여러 해 자란 진계(陳鷄)와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계(軟鷄), 진계도 연계도 아닌 활계(活鷄)입니다.”(일성록) 이 보고의 끝에 오래 묵은 진계 한 마리를 활계 두 마리로 셈한다는 내용도 있다. 연계는 당연히 활계보다 가격이 낮았을 것이다.

부드러운 ‘영계백숙’을 먹고자 하는 것은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나 혼자 먹겠다’는 우리 시대의 탐욕일 뿐이다. 하여, 우리는 부화한 지 30일이 채 되지 않은, 케이지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사료 먹고 자란 550g의 병아리로 헛보신을 하고 있다. 삼계탕 그릇까지 ‘550g 병아리’에 맞춰서 나온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통일된 음식이다. 25일 자란 닭은 병아리도 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보신이 될 리는 만무하고, 고기 맛도 나지 않는다. 시중 삼계탕에 들깨, 잣, 수입 견과류 등을 넣는 이유다. 어린 시절 먹었던 닭죽, ‘추리닝’으로 위장하고 먹었던 반계탕이 오히려 그립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