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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청소년까지 빠진 신경안정제… 병원 돌며 ‘처방 쇼핑’ 무방비

입력 | 2017-06-09 03:00:00

빅뱅 ‘탑’ 과다복용으로 본 실태




#장면1. 아이돌그룹 ‘빅뱅’의 탑(본명 최승현·30)이 이틀 넘게 의식을 잃었던 이유는 마약류(향정신성) 의약품인 벤조디아제핀 계열 신경안정제를 과다 복용한 탓으로 확인됐다. 한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불면증 치료용 향정신성 의약품(향정)은 중추신경계에 직접 작용하지만 정해진 양만 복용하면 대체로 안전하다”며 “의식 불명에 이르는 것은 며칠분을 한꺼번에 먹었을 때 생기는 일”이라고 말했다.

#장면2.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 박모 군(18)은 스트레스가 차오를 때마다 신경안정제를 찾는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는 친구로부터 신경안정제를 한 알 얻어 복용해본 뒤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박 군은 “친구가 약을 구해 주지 못하는 날엔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액체로 된 유사(類似) 신경안정제를 부모님 몰래 2, 3병 사 한꺼번에 마신다”고 귀띔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최근 이처럼 향정을 습관적으로 복용하다 오남용, 중독에 이르는 환자가 늘고 있다고 보고 현재 1, 2주인 ‘향정 처방 경고’ 기간을 내년부터 6개월로 대폭 늘린다고 8일 밝혔다. 환자가 한 달 내에 한 번이라도 향정을 투약한 기록이 있으면 다른 병·의원에서 같은 성분을 처방받으려고 할 때 의약품안전사용서비스(DUR) 시스템을 통해 의사에게 경고 메시지를 띄우는 방식이다. 심평원은 우선 의사가 향정 처방기록을 조회할 수 있는 기간을 한 달로 정해 연내에 진료 현장에 시범 적용한 뒤 이 기간을 내년부터 6개월로 확대할 계획이다.

현재는 향정 처방기록 조회 기간이 ‘환자가 해당 성분을 복용하는 기간’으로 제한돼 있다. 예컨대 환자가 A 의원에서 7일 치를 처방받았다면 8일째 되는 날 B 병원에서 같은 성분을 처방받으면 의료진에게 경고 메시지가 뜨지 않는다. 복용 기간(1∼2주)에 맞춰 병원을 옮겨 다니며 약을 타내는 이른바 ‘메뚜기’ 환자를 처방 단계에서 걸러낼 방법이 없는 셈이다.

게다가 약값에 건강보험 혜택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향정 처방기록은 의사와 약사가 DUR에 입력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해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이 같은 허점 때문에 2013년부터 3년간 병원 12곳을 옮겨 다니며 수면유도제 졸피뎀(향정)을 11년 치 처방받은 50대 여성 등 오남용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이는 입시·취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일부 청년층의 잘못된 인식과 어우러져 마약류 오남용으로 이어진다. 취업준비생 이모 씨(28·여)는 지난해 초 불면증 탓에 향정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은 뒤 증상이 없어진 현재도 약을 끊지 않고 있다. “면접을 앞두고 약을 먹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이유에서다. 보건복지부가 올해 처음 실시한 약물중독 실태 역학조사에 따르면 이 씨처럼 처방 향정을 오남용하는 환자는 19만6137명으로 추정된다. 관계당국은 대마나 코카 등 마약류 중독자가 13만5560명 정도라고 보고 있다. 병·의원에서 ‘합법적’으로 타 먹는 향정이 국경을 넘어 밀수되는 마약보다 위험하다는 뜻이다.

노년층도 예외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5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환자의 벤조디아제핀 계열 수면제 처방률은 한국이 1000명당 205.4명으로 OECD 평균(62명)의 3.3배였다.

정부는 내년부터 향정 처방 경고 기간을 확대하고 ‘마약류 통합 관리시스템’을 완비하면 향정 오남용 사례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새 시스템은 건강보험 적용 여부와 관계없이 환자에게 향정을 처방하면 취급 내용을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보고하도록 한 것으로, 내년 5월 현장에 도입된다. 김효정 식약처 마약관리과장은 “환자에게 유난히 향정을 많이 처방한 병원은 직접 조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서울 이대목동병원에 입원해 있던 탑은 8일 오후 의식을 되찾아 9일 퇴원할 예정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만약 처음에 신경안정제 처방을 결정한 의료진이 과다 복용 우려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면 의료법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며 “관할 보건소에 신고가 접수되면 조사에 나설 방침”이라고 말했다.

조건희 becom@donga.com·정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