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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한지 뿌리찾기 팔걷은 한국화가

입력 | 2017-06-09 03:00:00

한지 전도사 김호석 화백




한지를 만드는 닥나무 품종을 함께 연구하는 국립수목원 정재민 박사(오른쪽)와 김호석 화백이 7일 경기 포천시 국립수목원에서 자라는 애기닥나무 앞에 함께 섰다. 포천=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오랜 가뭄을 적시는 단비가 내린 7일, 경기 포천시 국립수목원에 무리지어 자라는 애기닥나무 앞에 화가와 식물학자가 함께 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려 유명한 한국화가 김호석 화백(60)과 국립수목원 정재민 박사(53·산림자원보존과 연구사). 두 사람은 어른 키보다 크게 자란 애기닥나무와 하루 전 경북 안동시에서 캐 온 감닥나무의 이파리 모양새를 비교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수묵화 그리는 화가가 식물학자의 일터에 찾아온 것은 한지(韓紙) 때문이다. 닥나무 껍질은 우리 전통 한지의 재료로 쓰인다. 두 사람이 살펴본 애기닥나무는 나무 크기와 이파리가 비교적 작은 반면 감닥나무는 이파리가 감나무처럼 크다. 한지의 재료가 되는 나무껍질이 너무 얇은 애기닥나무로는 한지를 생산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가 오갔다.

수십 년 동안 직접 제작한 한지에 그림을 그려온 김 화백은 손꼽히는 한지 전문가다. 오래전부터 한지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한지 제조법을 채록하고 관련 용품도 모아왔다. 김 화백은 닥나무를 손으로 두드린 뒤 양잿물이 아닌 천연잿물로 풀어내며 종이를 만드는 방법을 복원했다. 이렇게 재현한 한지는 정부의 훈·포장 용지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김 화백의 마음 한구석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재현한 종이의 밀도와 인장강도(당기는 힘을 버티는 정도), 내절도(종이를 접었다 펴는 움직임을 견디는 횟수) 등이 조선시대 정조가 썼던 간찰용 한지에 미치진 못했기 때문이다. 김 화백은 “옛날 그대로 만들었음에도 종이가 옛날만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수수께끼의 해답은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지난해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의 후손들이 김 화백에게 학봉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의뢰하면서다. 김 화백은 노 전 대통령은 물론이고 성철 스님, 법정 스님 등의 초상화를 그려낸 경험이 있다.

학봉 후손의 의뢰를 받은 김 화백은 거꾸로 과거 학봉이 쓰던 것과 같은 재질의 종이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학봉이 쓰던 종이와 같은 종이에 초상화를 그리겠다는 뜻이었다. 김 화백은 “2007년 노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가장 질긴 한지 재료로 유명한 머구닥으로 만든 한지를 썼다. 질기고 오래가는 그 종이가 노 전 대통령의 삶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기어이 안동 지역 감닥나무로 만든 종이를 얻어낸 김 화백은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빳빳한 질감과 먹이 전혀 번지지 않는 표면이 조선시대 최고 수준 한지와 맞먹었던 것이다. 김 화백은 “만드는 법에 앞서 과거엔 도대체 어떤 나무로 한지를 만들었던 것인지를 먼저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이후 김 화백은 정 박사와 함께 닥나무 유전자 분석에 나섰다. 두 사람은 현재 한지를 만드는 닥나무는 우리나라 곳곳에 분포하는 꾸지나무와 애기닥나무의 교잡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닥나무는 나무의 외형과 잎이 나는 모양 등도 두 나무의 중간 형태다. 반면 감닥나무는 이 닥나무에 다시 꾸지나무의 유전자가 섞인 품종으로 보고 있다. 전통 한지에 더 가까운 한지를 만들 수 있는 감닥나무를 찾아낸 두 사람은 꾸지나무와 애기닥나무를 이용한 다양한 교잡종을 새로 만들면서 어떤 교잡종이 좋은 한지 만들기에 적합한지를 알아낼 계획이다.

김 화백은 최근 인도 뉴델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첫 한국 작가 초대전이었다. 그러면서 김 화백은 인도 화가들을 따로 만나 한지를 소개하고 왔다. 민간인이면서 한지 전도사처럼 나서고 있는 김 화백은 “정부는 ‘천년한지’라고 홍보하지만 정작 진짜 한지가 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알지도 못한다. 전통문화를 제대로 다시 세우는 것은 이렇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천=김도형 기자 dod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