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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따각따각 당대 렌터카… 高價에도 호황 누린 ‘양반의 발’

입력 | 2017-06-12 03:00:00

말 대여업자 ‘세마꾼’




신윤복의 그림 ‘연소답청(年少踏靑)’ 간송미술관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세마(貰馬) 세 필을 내었으니 돈이 얼마나 들었겠니? 노자(路資)와 함께 열 냥이나 들되, 집에 돈이 턱없이 모자라 근이에게 빌렸단다.”(의성 김씨 김성일파 종택의 한글 간찰에서)

학봉 김성일의 11세손인 김진화(1793∼1850)의 부인 여강 이씨(1792∼1862)가 1847년 5월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명문 종가에서도 말을 빌리는(세마) 데 돈이 모자라 ‘근이’라는 친척의 신세를 졌던 것이다.

당시 말은 노비보다 더 비쌌다. 노비 한 명을 면포 150필 정도에 사고팔았는데, 말은 그 세 배에 달하는 400∼500필을 줘야 살 수 있었다. 말을 먹이고 관리하는 데 비용이 또 들기 때문에 말을 소유하는 것은 큰 비용을 치러야 했다. 이에 말이 필요한 이들에게 빌려주는 서비스가 생겨났다. 그들을 세마꾼 또는 세마부(夫)라고 불렀다. 지금의 렌터카나 택시, 택배와 같은 역할을 했으니 ‘조선판 종합 운수사업가’라고 할 수 있다.

왕실 기록에는 궁녀들이 궐 밖을 다니거나 물건을 옮기는 데 세마를 이용했다는 내용이 있다. 고전소설과 야담에서는 호탕하게 세마를 내어 오늘날 차를 렌트해 드라이브하듯 길을 떠나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강 이씨의 예에서 보이듯 양반가에서도 세마는 섣불리 쓰기 어려웠다. 이 씨는 비용 부담 탓에 “정신이 어지럽고 안정할 수 없어 괴롭다”고까지 적었다. 여강 이씨가 쓴 10냥은 얼마나 되는 돈일까? 당시 서울의 6칸짜리 초가가 20냥가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빌리려는 수요가 늘면서 작지 않은 규모로 말을 관리하고 빌려주는 가게인 ‘마계전(馬契廛)’이 호황을 누렸다. 여강 이씨의 또 다른 편지에는 3000냥이나 들여 서울에 마계전을 차리려는 동생을 뜯어말리는 내용이 보인다. 당시 서울의 괜찮은 기와집이 300냥 안팎이었으니 마계전을 차리는 데 기와집 10채 값이 들었던 것이다.

세마를 내면 견마잡이라는 말몰이꾼이 따라붙었다. 견마는 원래 관리에게만 허용되었으나 민간에서도 성행하여 견마잡이가 없으면 체면치레를 할 수 없다고 여겼다. 견마잡이는 손님을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고, 말을 세마꾼에게 돌려주는 일을 했다. 차를 빌리면 내비게이션과 운전사가 딸려 오는 격이다. 이들은 가야 할 곳의 지리를 훤히 꿰고 있기에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견마잡이가 고삐를 잡고 걸었기 때문에 말도 그에 맞춰 천천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듯이 말을 타고 급히 달리는 모습은 조정에 급한 보고를 올리는 파발마 외에는 보기 어려웠다. 실제로는 손님은 견마잡이가 이끄는 말에 탄 채 주변을 느긋하게 구경하며 갔다.

실학자 박제가(1750∼1805)는 이를 두고 ‘말의 속도를 활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고, 빨리 달릴수록 비싼 말이 상할 소지도 높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별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착불로 보내는 택배처럼 세마를 보낸 뒤 받는 쪽에서 대가를 지불하기도 했다. 급한 환자는 세마에 태워 의원에게 보냈으니 구급차 역할까지 맡았다. 나라에서 사용하는 역마(驛馬)가 부족하거나 중국으로 사행(使行)을 떠나는 경우에도 세마꾼에게 말을 빌렸다. 세마는 백성의 발 노릇을 충실히 해 주었다.
 
김동건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