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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사물 이야기]볼펜

입력 | 2017-06-14 03:00:00


최근에 하버드대에서 20년간 글쓰기 프로그램을 이끈 한 교수의 인터뷰와 그에 관한 칼럼들을 일간지 몇 군데서 읽었다. 글쓰기 실력 향상에 중요한 것은 학생들끼리 글을 읽고 평가해주는 “동료 평가(peer edit)”라는, 나도 크게 동의하는 그 말을 종강하는 날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합평회도 영어로 ‘peer group’이라고 한다. 창작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학생들은 자신의 글에 같은 반 또래들이 해주는 평가에 무척 민감해하며 영향을 받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친구들의 원고를 꼼꼼히 읽고 와서 말해주는 학생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수업 전에 나도 최소한 세 번쯤 원고를 읽는다. 처음 읽을 때는 연필로, 두 번째는 녹색 하이테크 포인트 펜으로, 세 번째는 모나미 153 빨간색 볼펜으로 체크해 가면서.

몇 년 전에 한 조각가와 일 이야기를 하려고 만난 자리에서 그가 쓰는 필기구들을 보게 되었다. 몸통이 노란 육각형 모양의 까만색, 빨간색, 파란색 볼펜을. 내가 자주 봤던 모나미 볼펜의 몸통 색깔과는 다른 게 신기해서 만지작거렸더니 그 조각가가 마음에 들면 쓰라고 했다. 익숙한 디자인인 데다가 막 쓰기에도 좋아서 그날 하나 가져온 빨간색 볼펜을 그 후 항상 필통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 무언가를 확정하고 표시하는 데 그 1밀리짜리 적색 볼펜만 한 게 없는 듯싶다. 어쩌면 유년시절에 짧아진 연필 끝을 깎아 볼펜에 끼워 썼던 몽당연필의 추억도 한몫했을지 모르겠지만.

문구에 관한 대부분의 책이나 최근에 출간된, 물건의 뒷이야기와 역사를 만화로 그리고 쓴 ‘물건의 탄생’에도 볼펜에 관한 챕터는 빠지지 않는다. 그간 읽은 책들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볼펜을 만든 가장 중요한 사람은 헝가리 태생의 ‘비로’라는 기자로 보인다. 만년필에서 잉크가 자주 새어나와 불편을 겪던 그는 어느 날 카페에서 어떻게 하면 잉크가 새지 않고 종이에 닿자마자 빨리 마르는 펜을 발명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궁리하고 있었다. 그때 길에서 구슬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물웅덩이를 지나간 구슬 하나가 젖은 자국을 남기면서 지나”가는 것도. 볼펜 끝에 없어서는 안 될 회전하는 구슬, 즉 “구형(球形)”의 아이디어는 그렇게 탄생되었다고 한다.

하버드대 글쓰기 교수는 “매일 10분이라도 글을 써야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럴 때 필기도구는 볼펜이 좋을 것 같다. 언제나 손 닿는 데 둘 수 있으며 촉을 조작하는 노크만 누르면 바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내가 쓰는 이 선명한 볼펜 한 자루에는 1킬로미터를 그을 수 있는 양의 잉크가 담겨 있단다. 이 여름, 매일 10분씩이라도 생각하고 글쓰기를 지속한다면 삶이 1킬로미터는 앞으로 나아갔다고 스스로 느끼게 될 순간도 오지 않을까.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