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와 비슷한 1만1437㎢의 면적, 인구 260만 명의 작은 나라 카타르가 최근 ‘중동의 화약고’로 변했다. 37세의 젊은 국왕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의 친(親) 이란, 개혁개방 노선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변 8개국과 극심한 갈등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5일 주변국과의 단교 사태에도 아랑곳 않고 ‘마이 웨이’를 고집하는 타밈 국왕은 2013년 집권했다. 조선 태종과 세종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즉위 과정, 활발한 소셜미디어 활용, 3명의 부인과 9명의 자녀 등 흥미로운 개인사를 갖고 있어 예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 2014년 9월 크리스티안 아만푸어 CNN 앵커와 인터뷰하는 타밈 국왕
○ 영국 유학파
타밈 국왕은 1980년 수도 도하에서 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 전 국왕(65)의 4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하마드 전 국왕의 둘째 부인 모자(58) 왕비. 하마드 국왕은 3명의 부인에게서 11명의 아들과 13명의 딸을 뒀지만 모자 왕비 슬하의 5남 2녀를 유독 아꼈다.
타밈은 동복형 자심(39)과 함께 어려서부터 영국에서 유학했다. 명문 사립학교 셔번 스쿨과 해로 스쿨,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고국으로 돌아와 카타르 육군에서 중위로 복무했다. 영어와 프랑스어가 유창하며 테니스, 배드민턴 등 각종 스포츠 실력도 수준급이다.
타밈 국왕의 젊은 시절 모습
그는 2005년 육촌 자와히르 왕비(2남2녀)와 결혼했다. 이어 2009년 요르단 대사의 딸 아누드 왕비(2남 2녀), 2014년 누라 왕비(1남)도 맞아 5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뒀다.
○ 쿠데타로 집권한 부친의 조기 양위
타밈은 1971년 영국에서 독립한 카타르의 4대 국왕이다. 초대 국왕은 타밈의 재종조부 아흐마드 빈 알리 알 타니(1920~1977). 아흐마드 전 국왕은 즉위 1년 만에 사촌동생이자 타밈의 조부인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1932~2016)에게 왕위를 뺏겼다.
쿠데타로 집권한 칼리파 전 국왕은 1995년까지 23년 간 집권하며 카타르 근대화에 주력했다. 하지만 1995년 6월 그가 스위스를 방문했을 때 왕세자이자 타밈의 아버지 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 전 국왕(65)이 역시 쿠데타로 부친을 밀어냈다. “일부 고위층이 부를 독식하며 석유 고갈 이후 카타르 미래를 고민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도하 시내에 건설 중인 2022년 월드컵 경기장
정치사회 변화도 주도했다. 1999년 여성 참정권을 부여하고 2005년 헌법을 채택해 입헌군주국 체제로 바꿨다. 전제군주국, 왕정 세습, 남녀 차별을 당연시하는 주변국 왕실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였다.
하마드 국왕은 알자지라 방송을 세워 서방에 아랍의 목소리를 전했고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했을 때 1억 달러를 기부해 서방의 환심도 샀다. 그가 집권하던 1995년 카타르의 구매력평가(PPP)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은 약 5만5561달러였지만 2017년 세계 1위인 14만5894달러(약 1억6632만 원)로 3배 가까이 불었다.
카타르를 부국(富國)으로 만든 그는 당초 왕세자로 타밈의 동복형 자심을 택했다. 그러나 자심은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친과 종종 불화를 빚었다. 결국 2003년 왕세자 자리를 동생에게 넘겨줘야 했다. 타밈은 형에 비해 신중하고 계산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여러모로 조선 태종과 양녕대군, 충녕대군(세종)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2013년 6월 33세의 타밈은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넘겨받는다. 세계 군주제 국가 중 최연소 국왕이었다. 중동 왕정국에서 선왕의 사망이나 쿠데타가 아닌 채 왕위를 승계한 사람도 그가 처음이다. 물론 자발적 조기 양위라 해도 절대 권력의 세습에 불과하고 하마드 전 국왕이 막후에서 상왕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본인도 쿠데타로 집권한 국왕이 61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순순히 왕위를 물려줬다’는 점만으로 세계적 관심을 모았다.
○ 페이스북을 즐기는 젊은 국왕
33세의 젊은 국왕 타밈은 취임 일성으로 “카타르만의 비전을 고수하겠다”고 밝혔다. 집권하자마자 각국 순방에 나섰다. 즉위 4개월 만에 걸프 각국을 돌았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 등 주요 지도자들도 잇따라 만났다.
한국에도 4차례나 방문했다. 왕세자 시절 세 차례(2002년, 2009년, 2011년) 방한했고 2014년 11월 국왕 자격으로 한국을 찾아 박근혜 전 대통령과 회담했다.
타밈 국왕의 개인 페이스북 계정
타밈은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과 가족의 일상사를 스스럼없이 공개했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아랍 왕가에서 왕실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소셜미디어에 공개한 국왕도 사실상 그가 최초다. 정부 정보화 및 인터넷·통신 고도화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국왕 직속기관 ICT 카타르를 통해 전자정부 구현도 추진 중이다.
타밈 국왕 페이스북에 공개된 왕자들과의 다정한 한 때
○ 갈등의 핵 ‘천연가스’
명목상으로 이번 단교 사태의 발단은 카타르 국영통신사 QNA의 친(親)이란 기사다. 5월 30일 타밈 국왕이 카타르 군사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이란에 대한 적대 정책은 명분이 없다”고 이란을 두둔했다는 내용이다. 카타르 정부는 통신사 웹사이트가 해킹을 당했다며 해당 보도를 부인하고 기사를 삭제했지만 단교를 피할 수는 없었다.
배후에는 더 크고 복잡한 문제가 있다. 바로 천연가스를 둘러싼 경제적 이익이다. 세계 천연가스 매장량의 14%를 보유한 카타르는 러시아, 이란에 이어 세계 3위 천연가스 보유국 겸 1위 수출국이다. 독립 당시 진주 채취가 주 소득원이었던 가난한 농업국 카타르가 40년 만에 세계 최고 부유국이 된 것도 막대한 천연가스와 원유를 같이 보유했기 때문이다.
사우디와 이란의 사이에 놓인 카타르 천연가스 유전지대
이 천연가스는 대부분 카타르와 이란 영해 사이에 매장돼있다. 비록 수니파 이슬람 국가지만 카타르가 시아파 이란과 잘 지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카타르가 약 7억 달러를 이란 정부와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 무장조직에 지원했다고 보도했다. 5월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직후 타밈 국왕이 로하니 대통령과 두 차례 전화하며 “강력한 협력관계를 맺기로 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처럼 카타르는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 종주국 이란이 팽팽히 대립하는 중동의 지정학적 긴장 속에서 어느 한 쪽 편을 드는 대신 ‘걸프만 균형자’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이것이 수니파 맏형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심기를 제대로 거슬렀고 단교라는 최악의 사태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 타밈과 카타르의 앞날은?
단교와 함께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국경 폐쇄, 화물운송 및 자국민의 카타르 방문 금지, 카타르인의 자국 입국 및 경유 금지를 단행했다. 갑작스레 물자 공급이 상당부분 차단되자 예의 이란이 제일 먼저 나섰다. 이란은 국영 항공사를 통해 카타르에 식량을 실어 날랐고 터키, 모로코 등도 카타르 지원에 동참했다.
현재 사우디 등은 국교 정상화의 조건으로 ‘이란과의 단교’를 요구하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를 넘어 이슬람 혁명으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이란은 걸프 왕정국에 눈엣가시다. 70, 80세가 넘은 고령의 왕들이 형제세습, 부자세습을 통해 절대 왕권을 유지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억누르는 것이 지상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란과 세계 최대규모 천연가스 유전을 공유하는 카타르로서는 이란과의 외교 단절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이다.
단교 사태 외에 내부 갈등도 심각하다. 260만 인구 중 카타르인은 30만 명에 불과하다. 이들이 부를 독식해 나머지 230만 명 이민자들과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타밈의 조부는 근대화, 부친은 국부 증진 및 산업 다각화라는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선대 왕과 맞먹는 훌륭한 왕으로 남을 수 있을까. 해답은 외교 갈등과 양극화라는 난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렸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