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노후아파트 참사… 국내 40년 넘은 3곳 점검해보니
15일 서울 중구의 40년 이상 된 아파트에서 소방전문가와 중부소방서 관계자가 안전점검을 하고 있다. 이 아파트는 10년 이상 된 소화기를 교체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나무 현관이나 복도 곳곳에 쌓아둔 폐가구 등은 여전히 위험 요소로 지적됐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동행한 전문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파트 비상 대피로를 찾아 내달렸다. 볕이 들지 않는 복도는 어두침침했다. 야광으로 된 유도표지등은 눈에 띄지 않았다. 복도 곳곳에는 자전거와 가구 문짝 등이 방치돼 있었다. 이리저리 몸을 피해야 위층으로 갈 수 있었다. ‘실제 상황’이 아닌데도 진땀이 났다. 박청웅 세종사이버대 교수(소방방재학과)는 “만약 한밤중 진짜로 불이 나 정전까지 된다면 이런 물건에 부딪혀 대피하기 힘들 것”이라며 “대부분 가연성 물질로 된 물건이라 화재 때 ‘불쏘시개’ 역할까지 해 더욱 위험했다”고 말했다.
지은 지 43년 된 영국 런던의 24층짜리 아파트에서 일어난 화재로 최소 10여 명이 사망하면서 국내 노후 건축물도 예외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본보 취재진은 박 교수와 함께 지은 지 40년 이상 된 서울의 노후 아파트 3곳을 긴급 점검했다.
15일 서울 중구의 한 10층짜리 아파트. 1970년 완공됐다. 불이 난 런던 ‘그렌펠타워’보다 4년 앞선다. 350가구 규모지만 리모델링을 앞두고 현재는 70가구만 거주하고 있다. 이 아파트엔 층별 방화벽이 없다. 아래층에 불이 나면 위쪽으로 급속히 번져 대형 참사로 이어질 위험성이 크다. 복도 위로 가스관이 지나가고 건물 외벽엔 낡은 전선줄이 뒤엉켜 있다. 불이 나면 모두 ‘시한폭탄’으로 변할 수 있다.
노후 아파트의 화재 위험성은 모두 비슷했다. 화재에 취약한 낡은 건축 자재가 여전히 많고 소방 설비도 취약했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한 아파트는 1930년대 완공된 5층짜리 아파트다. 아파트 안 곳곳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비상시 생명을 지켜줄 최후의 수단인 안전장치가 없었다. 소화전에는 비상등이 파손된 채 방치돼 있었다. 소화기는 도난 방지를 위해서인지 쇠줄로 묶여 있거나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스프링클러도 설치돼 있지 않았다. 옥상으로 가는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한 주민은 “믿을 건 소화기밖에 없는데 확인해 보니 사용기한이 지나 있었다. 관리실에 교체를 요청했지만 반응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40년 이상 사용 건축물은 15만5988동으로 전체 건축물의 25%에 달한다. 박 교수는 “당장 시설 보강과 법 개정이 어렵다면 화재 발생 시 대응 매뉴얼을 철저히 학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비상 대피로나 비상구 위치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하지만 노후 아파트 주민들은 화재 발생 시 대피를 위한 안내나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주민은 “구청에서 실태조사를 나왔는데 건물 벽체만 뜯어보고 아무 조치 없이 그냥 갔다”며 “화재 대피와 관련한 안내도 받지 못했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 초고층 건물도 불안
국민안전처는 런던 아파트 화재를 계기로 30층 이상 고층 건축물의 긴급안전점검을 실시한다고 15일 밝혔다. 긴급안전점검은 소방시설과 피난·방화 설비, 건축 외장재뿐만 아니라 가스 및 전기 설비도 포함된다. 긴급안전점검 대상에 포함되는 고층 건물 중 아파트가 2701곳이다. 전체 82.7%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최창식 한양대 건축공학부 교수는 “당장 사고 예방을 위해선 현장에서 재난 대응 매뉴얼을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있는지 당국이 확인해야 한다”며 “사고 발생 후 책임을 묻는 성격의 처벌보다 미흡한 예방과 대비를 처벌하는 쪽에 무게를 둬야 한다”고 말했다.
김배중 wanted@donga.com·신규진·정성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