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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의 워치콘 X]No무현과 문샤인(Moonshine)

입력 | 2017-06-17 03:00:00


이철희 논설위원

노무현 정부 초기였나 보다. 한 미국인이 불쑥 물었다. “너희 대통령 이름이 ‘로’가 아니라 ‘노’라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영문 이름을 ‘Roh’로 표기하지만 ‘No’로 발음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일종의 관행이고 내 이름도 ‘이’지만 ‘리(Lee)’로 쓴다고 설명하자 “흥미롭다”면서도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우리 표기는 ‘로무현’ ‘리명박’ 등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는 북한식에 더 어울리긴 하다.

“Roh라고? No가 맞지!”

이런 궁금증은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스피치라이터를 지낸 윌리엄 새파이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의 글 주제가 되기도 했다. 새파이어는 노무현 대통령 이름을 놓고 ‘Roh냐, Noh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칼럼에서 호기심을 유감없이 쏟아냈다. 여기저기서 취재한 내용을 종횡무진 늘어놓으며 노태우 전 대통령이 초급장교 시절 자신의 인식표에 새겨진 ‘No’를 보고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라며 ‘Roh’로 바꿨다는 에피소드까지 찾아냈다.

그의 결론은?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 했는데, 대다수 한국인에게 들리는 대로 쓰면 된다. ‘노’라고 부르면서 일관성을 위해 ‘No’로 쓰거나, 이국적 취향을 풍기게 ‘Noh’로 쓰면 될까? 난 ‘yes’다.” 미국인이야 한국식 표기가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남의 나라 대통령 이름을 가지고 가벼운 조롱을 늘어놓더니 결국 제멋대로 쓰겠다는 대목에선 할 말을 잃게 했다.

오래전 얘기가 새삼 떠오른 건 문재인 대통령 당선 직후 외신들이 새 정부의 대북정책으로 지칭한 ‘달빛정책(Moonshine Policy)’에서 묻어나는 꺼림칙한 뉘앙스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이름 ‘Moon’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Sunshine Policy)’을 조합해 만든 말이지만, moonshine은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절 한밤중 달빛 아래 몰래 만드는 밀주(密酒) 위스키를 뜻한다. 사전에는 ‘터무니없는 말, 헛소리’라는 의미도 나와 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선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부터 북한의 은밀한 외화벌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돼 왔다. 데이비드 애셔 전 국무부 자문관은 북한의 위조지폐, 위조담배, 마약거래, 무기밀매 같은 범죄활동을 ‘달빛경제(moonshine economy)’라고 이름 붙였다. 나아가 빅터 차 전 백악관 아시아담당 국장은 햇볕정책의 단물을 빼먹으면서도 개혁·개방은 철저히 차단하는 북한식 대응을 ‘달빛정책’으로 칭하고, 대표적 사례로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을 꼽았다.(‘불가사의한 국가’·2012년)

‘햇볕’에 北 ‘달빛’ 재가동?

사정이 이럴진대 외신들이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달빛정책’이란 이름을 붙였을 때 그 근저엔 새 정부에 대한 의구심 같은 게 깔려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행간에서 그런 뉘앙스를 읽었을 것이다. ‘Roh냐, No냐’라는 유별난 관심도 사실은 “반미(反美)면 어때?”라던 한국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에서 나왔던 것처럼 말이다.

문 대통령은 이달 말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과의 포괄적 협상 의지를 천명했다. 이런 햇볕정책 복원 의지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결과적으로 북한판 달빛정책도 재가동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부터 내놓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