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DB
주애진 경제부 기자
팀장: 본부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너무 서운해요. 제가 이 회사에 얼마나 열정을 쏟아 부었는지 잘 아시잖아요.
본부장: 알죠. 앞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내가 벌어 먹여 살리겠다”며 위로하는 남편에게 팀장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렇게 이해를 못하겠어요? 돈을 못 벌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내 일’을 하고 싶은 거라고요.” 평소 착한 친구를 괴롭히는 얄미운 캐릭터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가 안쓰러웠다.
앞으로 팀장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주변의 ‘워킹맘’들을 살펴보면 미래가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육아 부담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기 때문이다. 일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슈퍼우먼’이 따로 없다. 회사 일에 시달리다 퇴근한 뒤 아이를 챙기고 밀린 집안일까지 하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고 한다. 오죽하면 ‘독박육아’라는 신조어가 나왔을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의 삶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등장하는 부부의 대화는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이를 낳자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그로 인해 잃게 될 것들을 떠올리며 주저한다.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아내가 다그치자 말문이 막힌 남편은 더듬더듬 말한다. “나, 나도 지금 같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집에 일찍 와야 하니까 친구들도 잘 못 만날 거고. 회식이나 야근도 편하게 못 할 거고. 일하고 와서 집안일 도우려면 피곤할 거고. 그리고 그, 너랑 우리 애랑, 가장으로서…그래 부양! 부양하려면 책임감도 엄청 클 거고.”
문제는 희생을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현실이다. 이스라엘의 사회학자인 오나 도나스는 저서 ‘엄마됨을 후회함(Regretting Motherhood)’에서 여성에게 희생과 헌신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사회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 책은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는 여성 23명을 심층 인터뷰해 분석한 결과물이다. 인터뷰에 응한 여성들은 자녀를 낳은 것이 아니라 엄마라는 역할을 떠맡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금기처럼 여겼다. 저자는 이 같은 현상을 특별한 소수가 겪는 개인적 문제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사회에서 저출산 문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고차방정식이다. 여성에게 과도한 육아 부담을 지우는 사회적 구조가 해결되지 않으면 정부가 아무리 좋은 정책을 쏟아내도 헛수고다. 무엇보다 인식의 변화가 시급하다. 미래 세대를 길러내는 일은 여성만이 아닌 사회 전체가 함께 책임져야 할 과제다.
주애진 경제부 기자 ja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