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RPG'를 기억하는가? 아마 이 문구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최소 주변에서 '아재' 소리를 들을 법한 연륜을 지닌 훌륭한 게이머로 성장했을 것이다. 다양한 컨셉과 스타일로 무장한 게임이 쏟아지는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저 '고대어'는 한때 게이머들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만든 게임이자 RPG의 기틀을 세웠다고 평가받는 '울티마', '마이트앤매직' 그리고 '위저드리'를 칭하는 말이다.
위저드리(출처=게임동아)
이 '세계 3대 RPG' 중에서도 온라인게임의 기틀을 세운 '울티마'나 미칠 듯한 볼륨감으로 당시 청소년들의 수면권을 해친 주범으로 꼽히는 '마이트앤매직'은 국내 게이머들이 쉽게 떠올릴 수 있지만, 유독 '위저드리' 만큼은 생소한 것이 사실. 하지만 이 '위저드리'는 비록 국내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의 RPG 이른바 'JRPG'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게임으로 손꼽히고 있다.
'JRPG'는 하나의 스토리라인을 따라 주인공을 성장시켜 악을 무찌르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큰 틀을 지니고 있다. 이는 드래곤볼, 타이의 대모험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소년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방식의 스토리 전개를 보여주는데, 이는 높은 자유도를 보장하는 서양 RPG와는 완벽히 다른 형태다.
드래곤퀘스트2(출처=게임동아)
이 '드래곤퀘스트'의 던전과 전투 시스템의 모태가 된 게임이 바로 위저드리로, 실제로 위저드리는 일본에서 유난히 높은 인기를 누리며, 현재까지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게임 시리즈로 자리매김 하고 있는 상황이다.
1981년 처음 모습을 드러낸 위저드리는 당시 학생의 신분이었던 앤드류 그린버그 와 로버트 우드 헤드가 D&D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한 것에서 부터 출발했다. 물론 당시의 대다수 서양 RPG가 그랬듯 위저드리는 D&D의 요소를 컴퓨터로 구현한 CRPG의 형식으로 등장했는데, 상대에게 주는 대미지와 방어도를 육각면체 주사위로 정하는 '내성 굴림'이 등장한 것은 물론, 사망 시 교회에서 부활하는 시스템과 전사, 도적, 마법사 등의 파티가 1인칭 시점으로 등장하는 등의 독창적인 게임 콘텐츠를 선보이기도 했다.
특히, 사망 시 특정 장소에서 부활하는 시스템이나 파티별로 특성이 다른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전투 시스템을 대중화시키기도 했는데, 이는 JRPG 특유의 일정 장소에 도달할 경우 실행할 수 있는 세이브 시스템과 파티 플레이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물론 여기까지만 보면 당시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던 게임들과 큰 차이가 없었겠지만 위저드리가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치밀한 던전 시스템이었다. 당시 던전은 몬스터가 등장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단순히 스토리 진행상 필요한 도구 중 하나로 취급받고 있었는데, 위저드리는 이 던전을 게임의 메인 콘텐츠로 내세워 게이머가 던전 공략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위저드리(출처=게임동아)
이러한 던전 시스템은 치밀하게 구성된 던전에 숨겨진 함정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몬스터, 어떤 캐릭터를 구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난이도와 다양한 보상 등 지금의 던전 플레이의 기초를 세우기도 했는데, 더욱이 시리즈를 거듭함에 따라 직업 시스템과 던전 시스템, 그리고 세계관이 점점 확장되어 80년대 중반까지 다른 RPG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인기를 얻기도 했다.
특히, 일본에서의 영향력이 여느 게임보다 커서 드래곤퀘스트의 전투 시스템은 위저드리와 거의 흡사한 수준이었고, 드래곤퀘스트의 성공으로 이후 등장하는 JRPG 중 상당수가 이와 비슷한 스타일로 등장하는 등 지금의 JRPG의 기본 틀이 잡혀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RPG라는 새로운 꽃이 피어가던 일본의 게임시장에 큰 비료가 된 게임인 셈이다.
이렇듯 JRPG의 기초에 큰 영향을 미친 '위저드리'였지만, 9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의 인기를 토대로 일본 시장을 겨냥한 시리즈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마이트앤매직이 그랬고, 많은 서양식 RPG가 그랬듯이 '위저드리'는 사실 우주선이 등장하고, 서양식 스토리와 자유도를 담고 있던 게임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 직업에 닌자 및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등 기존 서양 RPG와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캐릭터는 서양식 그림체 그대로 인 상태로 말이다.)
다차원 세계를 다루고 있다고 하지만, 서양식 세계관에 맞지 않은 분위기 때문에 당시 게이머들에게도 많은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목표로 삼은 일본에서의 흥행은 나쁘지 않았고, 이후 '위저드리'는 완전히 일본 시장에 국한된 게임으로 방향성을 완전히 틀어버린다.
위저드리(출처=게임동아)
실제로 지난 2001년 등장한 시리즈의 정식 후속작인 '위저드리8'을 마지막으로, 위저드리 시리즈는 2006년 이후 일본의 게임회사 '아에리아IPM'에게 판권이 넘겨졌고, 이후에는 시리즈 대부분이 일본에서만 출시되거나 일본 풍의 게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위저드리(출처=게임동아)
심지어 2012년 모습을 드러낸 '위저드리 온라인'은 캐릭터부터 세계관 전투 콘텐츠까지 여느 일본 온라인게임 못지 않은 훌륭한(?) 모습으로 등장했는데, 빈약한 세계관과 콘텐츠 불안한 서버는 둘째 치고라도 일본 단독 서비스라는 놀라운 정책으로 서비스되어 전세계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렇듯 '세계 3대 RPG'로 손꼽히며 JRPG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결국 일본의 게임이 되어버린 '위저드리'. 비록 명맥이 끊겨버린 울티마나 연이은 졸작으로 존폐 위기에 빠진 마이트앤매직과 비교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과거 게임을 즐겼던 게이머들에게 이러한 변신은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한가지 반가운 소식은 과거 위저드리와 같은 서양식 RPG 스타일의 게임들이 크라우드 펀딩 등의 방식으로 개발이 시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략집도 없이 맨몸으로 게임을 돌파하던 그때 그 시절처럼 열정을 불태워 줄 게임이 다시 늘어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동아닷컴 게임전문 조영준 기자 zoroast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