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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부형권]“한글이 한국의 미래다”

입력 | 2017-06-21 03:00:00


부형권 뉴욕 특파원

“시아버지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무슨 일이든 다했습니다. 북한대사관을 찾아가 ‘인쇄물’을 얻어오곤 하셨는데 북한이 좋아서가 아니라, ‘한글책’을 얻을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해 11월 30일 쿠바 수도 아바나를 방문했을 때 1997년 쿠바 한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임천택 선생(1903∼1985)의 며느리 크리스티나 장 씨(89)가 이렇게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쿠바에 온 한인 1세대 임천택 선생은 한글을 지켜내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현재 남은 한인 후손 가운데 한국어를 쓰는 이들은 한 명도 없다. 장 씨와의 인터뷰도 스페인어 통역이 필요했다.

한국에선 영어 스트레스에 시달리지만 재외동포들은 한글을 잊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미국 뉴욕의 한인풀뿌리운동단체 간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가족 대화방에선 한글만 쓰도록 규칙을 정했다. 영어만 하던 초등학생 딸이 이 대화에 끼고 싶어서 한글을 배운다”고 말했다. 주말 한국(한글)학교에 자동차로 왕복 5, 6시간 걸리면서도 자녀를 꼬박꼬박 등교시키는 재미동포도 여럿 봤다.

한국학교 교사들은 “한글 교육 열기는 모국 한국이 발전할수록 더 뜨거워진다”고 말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에 이어, 삼성 LG 현대·기아자동차 같은 글로벌 기업의 활약, 최근 K팝 K드라마 K푸드 같은 한류(韓流) 열풍까지 가세하면서 한글 인기가 외국인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기자도 CJ E&M이 매년 주최하는 한류 페스티벌 ‘K콘(K-CON)’을 취재할 때마다 백인 흑인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의 미국인이 한국어 가사를 힘차게 따라 부르는 장관에 감격했다. 미국 내 한류 동호회 소속 인구가 해마다 급증하고, 한국어를 정식 과목으로 채택하는 미국 학교도 계속 늘고 있다.

한글의 이런 확장세가 어떤 미래로 연결될까.

“(스탠퍼드대가 자랑하는 비교언어학자인) 스티븐스 교수는 세계의 글자 없는 부족에게 가르쳐야 할 것으로 한글을 꼽고 있다.”

2015년 출간된 김진명 작가의 장편소설 ‘글자전쟁’에 나오는 내용이다. 최근 기자와 인터뷰한 세계적 설치미술가 강익중 작가(57)도 “한글은 널리 남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정신이 구현된 최고의 문자”라며 “한글이 문자 없는 나라들을 도와주면서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로세로 3인치(약 7.6cm) 정사각형 패널 한글 작품으로 유명한 강 작가는 r, v, z, th, f의 다섯 개 영어 자음을 l, b, j, t, p 발음과 구별할 수 있도록 한글의 ㄹ, ㅂ, ㅈ, ㅌ, ㅍ에 일획을 추가하는 그 나름의 ‘한글 혁명’을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한글에 느끼는 유일한 아쉬움을 해결하려는 시도다.

뉴욕에 본부가 있는 유엔의 6대 공식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이고, 7번째 자리를 방글라데시의 벵골어, 인도의 힌디어, 포르투갈어, 터키어 등이 노리고 있다. 모두 한국어보다 사용 인구가 많다. 그러나 한국어가 한류 열풍을 따라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퍼져나가고, 홍익인간의 정신을 실천하며 문자 없는 오지 나라에도 한글이 전파된다면 유엔 공식 언어로 당당히 자리를 잡는 날도 올 것 같다. 강 작가는 “모음과 자음이 만나서 소리가 나오는 한글은 갈라진 남북한을 하나(통일)로 이끌 비밀 열쇠”라고도 했다.

3년 미국 특파원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한글이 이끌 통일한국의 찬란한 미래’에 대한 꿈 하나만큼은 귀국 비행기에 싣고 가려 한다. 그 꿈과 함께하는 귀국길은 가슴 벅찰 것 같다.
 
부형권 뉴욕 특파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