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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窓]전우 유해찾기 혼신… 90대 老兵의 쓸쓸한 죽음

입력 | 2017-06-22 03:00:00


6·25전쟁 참전용사 고 서정열 씨(지팡이를 짚고 선 노인)가 생전에 강원 백석산에서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마친 뒤 장병들에게 “전우를 찾아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제공


지난달 11일 경기 평택시 평택병원 장례식장. 4인용 탁자 10여 개가 놓인 빈소는 텅 비어 있었다. 상주(喪主)는 멍하니 영정을 쳐다봤다. 영정 속 인물은 6·25전쟁 참전용사 서정열 씨(92)다. 빈소 한구석엔 불에 그슬린 고인의 휴대전화와 지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휴대전화의 최근 발신·수신 목록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전화번호가, 지갑엔 구순을 넘긴 또 다른 참전용사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가 있었다. 아들 성석 씨(60)는 “죽는 순간에도 전우만 생각한 분인데 마지막 가는 길이 참 쓸쓸하다”며 허공을 쳐다봤다.

지난달 3일 인천 부평구의 다세대주택에서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서 씨가 늦은 점심을 챙겨 먹으려고 휴대용 버너에 불을 붙인 순간이다. 순식간에 화염이 서 씨를 덮쳤다. 전신의 60%에 3도 화상을 입은 그는 병원에서 고작 8일을 더 버텼다. 차가운 땅 속의 전우들을 찾겠다고 가족까지 멀리한 채 홀로 살던 그였다. 국가보훈처가 보증금 500만 원을 지원해 마련한 33㎡(약 10평) 남짓한 월세방이었다. 성석 씨는 “얼마 전까지도 산에서 죽어도 행복하니 슬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화재사고라니…. 이런 모습으로 돌아오실 줄 알았다면 우겨서라도 같이 살 걸 그랬다”고 말했다.

서 씨의 삶은 굴곡졌다. 1950년 6월 7사단에 배속돼 참전했다 부상을 입고 1953년 전역했다. 그러나 군이 그의 이름을 잘못 기재한 탓에 61년 동안 참전용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2014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이후에도 순탄치 않았다. 그는 “전우들을 찾아 현충원에 묻어줘야 한다”며 전국을 혼자 돌아다녔다. 전투가 치러진 전국의 산을 올랐다. 2015년 유해발굴단이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하러 백석산을 찾았을 때 서 씨도 거기 있었다. 이후 유해발굴단과 함께 강원도, 경상도의 산을 오르며 6차례 유해를 발굴했다.

그의 기억과 증언은 유해 발굴에 큰 힘이 됐다. 67년 전 전우를 잃은 곳을 기억해 냈고 백석산 전투에서 산화한 전사자들의 유해를 찾아냈다. 서 씨는 유해를 건드리지도 못한 채 “이제 집에 가자”며 오열했다.

생존한 참전용사 중 유해발굴단과 함께 길을 나선 사람은 서 씨가 유일했다. 자식들은 이런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서 씨는 “동생처럼 아끼던 통신병을 품 안에서 잃었다. 주검을 끌어안고 ‘꼭 다시 돌아와 가족들 곁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자식들에게 털어놨다. 이후 성석 씨가 산을 함께 오를 때도 있었다.

유해발굴단은 서 씨를 “정이 많았던, 하지만 외롭고 쓸쓸했던 노병”으로 기억했다. 전역했을 때 그의 다리와 눈에는 수류탄 파편이 박혀 있었다. 다리를 절고 왼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은 그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다.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기 전까지는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으며 살았다. 청년일 때는 적군과 맞섰고, 전역 이후에는 외로움과 싸웠다.

서 씨가 세상을 떠난 지 보름이 지나서야 유해발굴단에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도 백석산을 오르기로 한 그가 나타나지 않아 발굴단이 수차례 휴대전화로 연락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길로 류수은 발굴팀장이 서 씨가 안장된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았다. “이제는 외롭지 마십시오. 품에서 잃은 전우를 곧 다시 만나시길 바랍니다.” 나무로 엉성하게 만든 임시 묘비 앞에서 류 팀장은 눈물을 삼켰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