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문학자의 6·25/강인숙 지음/376쪽·1만8000원·에피파니
1951년 1월 5일 중공군에 서울을 다시 빼앗긴 이튿날 남하하는 피란민들의 모습. 저자의 가족들은 이때 뿔뿔이 흩어졌다가 기적적으로 재회했다. 에피파니 제공
저자 가족은 피란길이 남하하는 전선에 추월당해 전장의 한가운데 선다. 가족들은 정자리(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의 한 집에서 양쪽에서 날아드는 총알을 피한다. 분당리는 동네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고, 집집마다 남아 있던 수백 개의 장독이 불길에 달아 장이 팥죽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저자는 “이제는 고층 아파트촌이 됐지만 내 머릿속의 분당리에서는 대지의 신이 뿜어내는 분노처럼 오늘도 장독들이 펄펄 끓고 있다”며 “그날 장독대의 이미지가 나를 반전주의자로 만들었다”고 썼다.
가족들은 피란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열여덟 살 소녀의 감성은 공산치하의 서울이라고 어디 가지 않는다. 서울로 돌아온 저자는 서강에 물드는 노을을 보며 황홀해하고, 밤마다 뒷동산에서 별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1·4후퇴 때 서울시민은 확실하게 서울을 떠나는 것을 택했다. 공산군은 자신들이 구제하려 한다는 빈민과 프롤레타리아까지 모조리 도망쳐 거의 비어버린 서울에 재입성한다. 1·4후퇴 당시 가족들의 피란길을 묘사하는 부분은 전쟁을 겪지 않은 독자로 하여금 눈을 떼려야 뗄 수 없게 만든다.
서울 동숭동 서울대 교정의 저자(왼쪽)와 이어령씨. 에피파니 제공
“거기에서 나의 소녀시절은 끝났다. 뿌리가 햇빛에 드러나서 설익은 채 늙어버리는 올감자처럼, 전쟁 때문에 우리는 질서의 고마움을 너무 일찍 터득해서, 겉늙어버렸다.”
저자는 건국대 국문학과 교수와 문학평론가로 일했고, 지금은 영인문학관 관장이다. 남편은 전시 부산의 서울대 문리대에서 만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다. 책 후반부는 당시 서울대의 얘기다. 정돈된 문장으로 비극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솜씨가 평생 문학을 연구한 이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