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윤상호 전문기자
헌팅턴은 민군(民軍) 관계에도 깊은 통찰력을 발휘했다. 18세에 예일대를 졸업한 뒤 시카고대에서 석사 학위, 24세에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의 첫 저서는 ‘군인과 국가(The Soldier and The State)’였다. 그는 이 책에서 ‘어떤 민군 관계가 대내외적 안보를 가장 잘 지켜줄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그러면서 거대한 전문적 무력집단(군)과 자유주의적 민간사회가 긴장과 갈등을 넘어 공존의 길을 찾는 것이 국가안보의 첩경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책 말미에서 20여 페이지에 걸쳐 국방장관의 자질과 역량도 거론했다. ‘많은 경험과 전문성을 갖추고, 존경과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외부압력과 이해관계에서 자유롭고 정치적 야망이 없는 전략가’를 국방수장의 자격으로 꼽았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자격을 갖췄던 국방장관은 얼마나 될까. 15년간 국방 분야를 취재하면서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주변에 물어봤지만 대개 신통찮은 반응이 돌아왔다. 이번에도 ‘별로 꼽을 만한 분이 없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변이 많았다. 오히려 정권의 눈치를 보거나 시류를 좇느라 군과 안보를 망가뜨린 일부 장관에 대한 날선 비판이 적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역대 어느 정권이든 안보에는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각 정권의 이념과 대북정책 기조에 따라 국방·안보 정책이 갈지(之)자 걸음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문제만 해도 그렇다. 노무현 정부가 대미(對美) 군사주권 회복을 내세워 추진한 전작권 전환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잇달아 연기됐다가 문재인 정부가 재추진을 공약했다. 전작권이 전환되면 한미 군사력의 지휘·운용 절차의 일대 변화가 불가피하다. 한반도 위기 시 국민 생명과 재산의 안위가 걸린 중대사다. 명분과 당위성을 내세우기에 앞서 우리 군의 능력과 안보 상황, 장단점 등을 철저히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전작권 전환은 이념 다툼과 정쟁의 도구로 변질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찬성은 ‘반미좌파’, 반대는 ‘친미우파’로 갈려 소모적 국론 분열이 반복됐다. 정권에 따라 핵심 안보 현안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면서 한미동맹의 피로감도 누적됐다.
병력 감축과 병 복무기간 단축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선(大選) 때마다 표에 눈이 먼 후보들이 두 사안을 덜컥 공약했다가 예산과 부작용 문제로 번복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군과 안보의 대한 불신의 벽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정권과 ‘코드’를 맞추느라 안보에 금이 가는 사태를 수수방관한 군 수뇌부의 무소신과 무능 탓이 크다.
군은 정권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에 충성하는 조직이어야 한다. 군의 수장인 국방장관이 대통령에게 안보현실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메신저’가 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군 통수권자도 국방장관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도록 신뢰하고, 힘을 실어줘야 한다. 이게 안 되면 군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고, 안보도 무너진다.
헌팅턴은 자유주의적 가치와 이상을 수호하려면 국가안보가 확보돼야 하고, 이는 강력한 군사 전문집단의 몫이라고 했다. 군이 그 몫을 제대로 하도록 이끌 수 있는 인물이 국방수장이 돼야 한다.
윤상호 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