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형 연구위원 日문헌 통해 밝혀
1920년 3월 1일 프랑스 쉬프에서 독립선언 기념 축하식을 연 재법한국민회 회원들. 프랑스 유학생 나기호의 자서전 ‘비바람 몰아쳐도’에 실린 사진이다. 김도형 연구위원 제공
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북극해의 항구 도시 무르만스크에서 일하다 영국 에든버러를 거쳐 프랑스에 도착한 것은 알려져 있지만, 왜 무르만스크에 있었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27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할 예정인 논문에서 이들이 무르만스크로 가게 된 경위를 일제(日帝) 자료 등을 통해 최근 새로 밝혔다.
김 연구위원은 “즉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배로 국내에서 살기 어렵게 되자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나간 노동자들”이라며 “영국군이 제1차 대전이 끝날 무렵 무르만스크를 점령했다가 철도회사에 고용된 한인 노동자들을 영국군 소속으로 전환해 잡역을 시켰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연구소가 최근 발견한 당시 영국 신문에는 영국군이 제1차 대전 뒤 러시아에 남아 있는 영국군 포로를 데려오기 위해 무르만스크에 갔다가 러시아인 피란민과 중국인, 한국인 노동자 등 800명을 데리고 1919년 10월 영국에 왔다고 보도됐다. 여기에 무르만스크 한인 노동자 200명이 포함됐다. 이들 중 147명은 일본에 의해 중국 청도를 거쳐 조선으로 귀국했다.
재법한국민회를 만든 건 파리위원부가 영국 외교부와 협상해 프랑스로 데려온 35명과 함께 별도로 프랑스에 와서 고학을 하며 학비를 벌던 조선인 유학생들이다. 이들은 제1차 대전 당시 격전지였던 쉬프에서 복구 사업에 투입됐다.
재법한국민회는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축하식을 열었을 뿐 아니라 6개월 만에 6000프랑을 모아 파리위원부에 기부하기도 했다. 김 연구위원은 “당시 프랑스의 한인 노동자가 50명 정도였고, 한 달 임금이 많아야 100프랑을 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1인당 수입의 4분의 1 이상을 매달 모았던 것”이라며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만 그동안 파악하기 어려웠던 재법한국민회의 실체에 한 걸음 접근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