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영웅’ 서윤복 옹 별세]1947년 대회… 동양인 첫 우승 국민 모금으로 어렵게 여비 마련… 손기정 감독 신발 빌려 신고 역주 김구선생 ‘족패천하’ 휘호 선물… 은퇴후 40년간 육상발전 위해 봉사 동아일보, 우승당시 ‘제패송’ 제작 배포… 함기용 선생 “위대한 스포츠의 별”
서윤복 선생의 영정이 27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빈소에 놓여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이겨서 한국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내 사명일 것 같았다. 물론 내 이름이 드러나 나쁠 것도 없었다. 나라 없는 설움도 크지만 나라가 있어도 알려져 있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후일 한 잡지에서 회고했듯이 ‘이겨서 한국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던 1947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서윤복 전 대한육상연맹 고문이 27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엄격한 스승이었던 고 손기정(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 당시 그의 감독이었다. 손기정의 신발을 빌려 신고 출전한 그는 레이스 도중 개가 달려들어 넘어졌으면서도 2시간 25분 39초의 당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다. 보스턴 마라톤은 1897년 시작한 세계 최고(最古)의 대회다. 그는 이 대회 최초의 동양인 우승자였다.
그때 그 감격 고 서윤복 선생이 1947년 4월 19일(현지 시간)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1897년 시작한 이 대회에서 아시아인이 우승한 것은 처음이었다. 고인이 기록했던 2시간25분39초는 당시 세계 최고기록이었다. 동아일보DB
동남아와 일본 등을 거치는 화물선을 얻어 타고 출항 18일 만에 인천항에 도착한 그는 큰 환영을 받았다.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모금을 통해 환영회를 열었고 민족지도자 김구 선생은 ‘족패천하(足覇天下·발로 천하를 제패하다)’라는 휘호를 써줬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늘어선 인파 속에 ‘뚜껑 없는 차’를 타고 환영을 받았다.
그는 보스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이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인 농부들을 만났을 때였다고 했다. 오랫동안 남의집살이를 하며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무시받았던 그들이 그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그때 잡았던 그 농민들 손의 감촉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이렇듯 뜨거운 민족애는 그를 한평생 달리게 한 원동력이었다.
일본인들이 입던 헌옷을 입고 동대문에서 구한 헌 스파이크 운동화 밑창의 징을 빼고 리어카 바퀴의 고무를 잘라 덧댄 신발을 신고 뛰었다.
동아일보, 보스턴 우승 대서특필… 런던올림픽 마라톤 후원 고 서윤복 선생의 보스턴 마라톤 제패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1947년 4월 22일자 3면. 동아일보가 1948년 런던올림픽 마라톤 후원사업을 시작한다는 내용과 동아일보가 만든 ‘마라톤 제패송’ 가사 등이 실려 있다. 동아일보는 이날 전체 4개 면 가운데 2, 3면을 마라톤 기사로 채웠다.
고인은 대한육상연맹 이사, 전무, 부회장 등을 거치며 40여 년간 한국 육상을 위해 봉사했다. 1961년부터 17년 동안 서울시립운동장장, 1978년부터 4년 동안 대한체육회 이사로 전국체전위원장직을 수행했다. 국민훈장 동백장, 체육훈장 거상장, 문화포장 등을 받았다. 대한체육회는 2013년 그를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했다.
이날 빈소에는 1950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함기용 전 대한육상연맹 부회장(87), 이기흥 대한체육회장(62), 양재성 대한육상연맹 고문(80) 등 많은 육상·체육 관계자들이 찾았다. 함 전 부회장은 “손기정 선배가 베를린에서 우승했을 때는 우리 민족이 일제하에서 같이 울었어. 서윤복 선배가 보스턴에서 우승했을 때는 해방된 민족으로서 울고 웃었지. 위대한 스포츠의 별이었지”라고 말했다. 그는 “서 선배는 그만큼 국가를 믿었고 투철한 국가관이 있었어. 그래서 우승한 거야”라고 말했다.
한국 마라톤이 다시 한 번 영광을 누리기를 소망했던 마라톤의 거목은 94년에 걸친 인생 레이스를 마쳤다. 유족으로는 부인 용영자 씨와 1남 2녀가 있다. 장례는 대한체육회장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29일 오전 9시. 02-3010-2292
이승건 why@donga.com·정윤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