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북거래 中은행 제재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사상 처음 중국 본토에 있는 은행을 북한 핵·미사일 프로그램과 연루된 자금세탁 우려 기관으로 지정해 제재한 것은 중국과 북한을 동시에 압박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4월 정상회담으로 시작된 미중 간 ‘북핵 허니문’이 사실상 끝났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미 정상회담 직전에 제재 조치를 발표한 것은 북한과 대화를 강조하는 문재인 정부에도 압박의 메시지라는 분석이 나왔다.
○ 제2의 BDA로 북·중 동시에 조이나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부 장관은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백악관 브리핑에서 “북한으로 가는 모든 자금을 차단하는 데 전념하겠다”며 단둥(丹東)은행에 대한 조치가 지난해 5월 북한을 자금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지정한 후 처음으로 ‘애국법’(제311조)에 근거해 내린 돈세탁 우려 기관 지정이라고 설명했다. 므누신 장관은 “단둥은행 규제는 이 조치(북한의 자금세탁 우려 대상국 지정)에 따라 중단시킨 첫 은행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계속 이런 행위를 찾아서 제재할 것”이라며 중국 기업과 은행에 대한 추가 제재를 시사했다.
전문가들은 단둥은행 제재가 북한 금융거래에 큰 타격을 입혔던 제2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사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BDA 사태는 2005년 미국 재무부가 마카오의 중국계 은행 BDA를 자금세탁 의심 은행으로 제재하면서 BDA에 예치된 북한 김정일의 통치자금 2500만 달러(현재 환율로 약 286억 원)를 동결시킨 것을 가리킨다. 북핵 6자회담에 따라 비핵화 조치를 진행 중이던 북한은 극렬하게 반발하며 대화에서 이탈했다. 당시 북한 관리들은 비공개 석상에서 “BDA 때문에 죽겠다”고 하소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미국 재무부가 동결된 자금의 북한 송금을 허용했지만 정작 중국 내 은행들은 BDA와 엮였다가 미국 금융시스템에서 배제될 것을 우려해 송금에 협조하지 않는 기이한 현상까지 발생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단둥은행은 중국 은행 중 하위 20%에 해당하는 작은 규모다. 하지만 이번 제재로 북한과 비밀리에 거래하던 다른 은행들이 미국 금융 시스템 접근권을 박탈당할 것을 우려해 북한과의 거래를 중단하는 ‘단둥은행 이펙트’가 일어날 수 있다고 미국 전문가들은 예상했다. 미국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는 이후에도 중국이 만족할 만한 대북 압박에 나서지 않을 경우 미국이 북한과 정상 거래하는 중국 개인과 기업에 대한 본격적인 세컨더리 보이콧에 나설 수 있다는 최종 경고음으로 해석했다.
○ 미중 ‘마러라고 밀월 공조’ 깨져
따라서 미국이 단둥은행 제재를 선언한 것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북핵 문제에서 협력해온 미중 간 ‘마러라고(미중 정상회담이 열린 미국 리조트) 공조’가 깨졌음을 뜻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트위터 등을 통해 중국의 대북 제재 이행에 대한 아쉬움을 잇달아 피력했다. 뒤이어 국무부가 중국을 4년 만에 북한과 같은 수준의 인신매매국가로 재지정하더니, 이번에는 재무부가 독자 제재의 칼을 꺼내 들었다. 외교 당국자에 따르면 중국이 21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중 외교안보대화에서 대북 압박 의사를 밝히지 않은 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 배치 철회를 노골적으로 주장하자 미국 측에서 큰 실망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뿐 아니라 미국은 대만에 13억 달러(약 1조4900억 원) 규모의 무기 판매까지 승인하면서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약속까지 거둬들였다.
추이톈카이(崔天凱) 주미 중국대사는 이날 “무기 판매와 단둥은행 제재는 미중 양국 간 신뢰를 약화시킬 뿐 아니라 마러라고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 정신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직전에 이런 조치가 발표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미중 정상회담 도중 시리아 폭격을 통해 북한도 공격할 수 있음을 중국에 압박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문재인 정부가 사드 지연 배치를 계기로 미중 간 줄타기 외교를 시도하려 한다고 본 미국이 대북 강경 기조를 문 대통령에게 재각인시켰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