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와의 전쟁’ 모술 탈환 숨은 영웅들
[1]전직 미군 특수부대 장교인 데이비드 유뱅크가 지난달 이슬람국가(IS) 저격수들의 총격 속에서 어린 이라크 소녀를 구출해 나오고 있다. 그는 “내가 소녀를 안고 있는 사진을 볼 때마다 소녀가 잘 버텨줬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나온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유뱅크의 트위터 [2]IS의 공격을 피해 뛰어가다가 넘어진 할머니를 한 이라크군 병사가 헬멧도 쓰지 않은 채 달려가 구해 나오고 있다. 이 사진은 이라크에서 큰 화제가 됐다. 데일리메일 홈페이지 캡처 [3]다리와 배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환자가 모술 남부 ‘국경없는 의사회’ 야전진료소에서 치료받고 있다. 국경없는 의사회 [4]쿠르드 민병대원인 아코 압둘라흐만의 BMW 방탄차는 IS의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부상자 70여 명을 태워 날랐다. CNN 홈페이지 캡처
IS는 ‘성지(聖地)’를 지키기 위해 반달리즘(예술품과 문화유적 파괴 행위)까지 자행하며 최후의 발악을 했지만 결국 모술에서 패퇴했다. 시리아 락까와 함께 IS의 양대 거점인 모술이 해방된 데에는 이라크군의 대대적 공세뿐 아니라 ‘숨은 영웅’들의 노력도 큰 힘이 됐다.
“젊은 여성, 할머니, 휠체어에 앉아있던 노인, 휠체어를 밀던 남성,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 모두 총에 맞아 죽어 있었습니다.”
미국 특수부대 장교 출신으로 현재 총알이 빗발치는 모술의 최전선에서 구조대원으로 맹활약 중인 데이비드 유뱅크(56)는 최근 ABC CBS 등 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향 텍사스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구호단체를 따라 미얀마에 갔던 유뱅크는 지난해 11월 가족들과 함께 모술로 자리를 옮겨 인도주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중순 무렵. IS 저격수들의 조준 사격에 무고한 민간인들이 하나둘씩 쓰러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그의 눈에 한 작은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70여 구의 시신과 건물 잔해 속에서 이 아이는 숨진 엄마의 히잡에 몸을 숨긴 채 움직이고 있었던 것. 이런 상황은 이틀째 계속됐다.
유뱅크는 마침내 소녀를 구출하기로 결심하고 포복 자세로 기기 시작했다. 머리 위쪽으로는 총탄이 계속 날아들었다. 연막탄을 터뜨린 뒤 이라크군 탱크 뒤쪽에 숨어서 목표로 정한 벽까지 신속하게 이동했다. 다행스럽게도 총격을 피해 소녀를 안전하게 구출해냈다. 유뱅크는 ABC와의 인터뷰에서 “소녀를 구하러 뛰어 들어가던 순간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아내와 아이들은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란 생각이 들었다”며 “나는 죽기 싫었지만 (소녀를 구하러 들어가야 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 소녀를 포함해 IS 총격 위험에 처한 민간인들을 구출해내면서 유명 인사가 됐지만 유뱅크는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는 점을 안타까워한다.
“가족이 함께 죽어 나가는 모습을 (거의 매일) 봅니다. 19세쯤 된 어린 엄마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와 함께 제 팔에 안겨 죽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비정부기구(NGO)인 ‘국경없는 의사회’가 지난달 초 공개한 모술지역 의료진의 활약상도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원이 공개되는 게 두려워 가명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의사 와심이 일하던 병원은 공습을 받아 콘크리트 기둥이 한 환자의 다리 위로 무너졌다. 다리 절단 수술이 필요했지만 당시 병원에는 남아있는 의약품이 거의 없었다. 절망적인 순간에도 의료진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모르핀 한 개만을 가지고 수술을 진행해 결국 환자를 살렸다.
그리고 모술을 떠나지 않은 의사들은 영웅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모술에 영웅은 없습니다. 희생자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의사로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피란민 위한 군인들의 희생
모술 탈환전에 투입된 군인들 중에서도 영웅적인 행동으로 박수를 받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지난달 1일 모술 구시가지에서 IS의 자동소총 난사를 뚫고 도로를 내달려 피신하는 주민들을 군인들이 구해내는 과정을 담은 영상을 공개했다. 군복에 달린 보디캠으로 촬영된 영상에는 도로를 달리다가 넘어진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한 이라크 병사가 헬멧도 쓰지 않은 채 급하게 달려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쏟아지는 총알 세례에도 병사는 부르카를 입은 채 넘어져 움직이지 못하는 할머니를 들어 안전지대로 옮겼다.
민병대도 정규군 못지않게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CNN에 따르면 이라크 쿠르드민병대 페슈메르가 병사인 아코 압둘라흐만(33)은 지난해 10월 21일 모술 남동부 키르쿠크에서 방탄 BMW 차량으로 70명이 넘는 생명을 구해냈다. 4명의 자녀를 둔 가장인 그는 당시 IS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1만 달러를 주고 구입한 1990년대 초반 모델인 방탄 BMW를 몰고 최전선을 오갔다.
IS의 파상공세로 당시 전선에는 100명이 넘는 시민과 병사가 부상을 당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는 “우리 고향이 위험에 처해 있고 지금이 사람들을 도울 적기다. 만약 돕지 않으면 평생 부끄러울 거다”라고 말하며 총알이 쏟아지는 전장으로 방탄차를 몰았다. 그가 전장을 왕복하며 태워 나른 부상자들 중에는 수니파와 시아파 같은 다른 종파의 무슬림뿐 아니라 쿠르드족과 기독교인도 있었다.
압둘라흐만의 방탄차량에는 50발이 넘는 총알 자국이 선명하다. 사연을 접한 독일 BMW 본사는 압둘라흐만의 차를 본사에 전시하는 조건으로 최신형 방탄차량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나는 영웅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고 싶은 평범한 이라크인입니다. 그 대신 차량을 계속 쓸 수 있게 수리를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작은 영웅이 필요한 미래의 모술
이라크 제2의 도시, 대형 유전지대, 북부의 거점 도시 등으로 불려온 모술은 아랍어로 ‘연결 지점’이란 뜻이다. 이런 의미에 걸맞게 모술은 이라크는 물론이고 중동 전체에서도 종교와 인종에 상관없이 공존하는 전통이 강한 지역으로 꼽혔다.
오랜 시간 동안 아랍인과 소수 민족인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야지디인 등은 큰 충돌 없이 공존했다. IS가 점령하기 전까지는 인구 다수가 무슬림인 상황에서도 ‘선지자 요나의 무덤’과 ‘성 엘리야 수도원’ 같은 기독교 유적들도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이라크 안팎에서는 IS로부터 해방된 모술이 예전처럼 공존과 평화의 도시로 재건되길 기대한다. 이원삼 선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IS처럼 폭력적인 집단이 3년 이상 점령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라크 정부의 힘만으로 모술이 정상화되기는 힘들 것”이라며 “국제사회 차원에서 의료진, 구호 전문가, 도시 재건 전문가, 사회봉사자들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모술에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작은 영웅들’이 모술 재건에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카이로=조동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