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고시마현 미야마 마을의 심수관요에 설치된 조선식 오름가마. 미야마=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마을은 부드럽고도 둥그런 동산들이 펼쳐진 분지형 지대에 들어서 있었다. ‘아름다운 산’이라는 마을 지명과 썩 어울리는 터다. 풍수적으로는 주로 이런 터에서 예인(藝人)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본다. 실제로 이곳에서 일본 도자 문화의 3대 도맥(陶脈) 중 하나인 ‘사쓰마야키(薩摩燒)’가 탄생했다. 조선 도공의 후손이자 마을의 터줏대감인 심수관요(沈壽官窯)에 의해서다. 심수관요는 사쓰마야키를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아들(15대 심수관)에게 습명(襲名·이름을 이음)한 뒤 현업에서 은퇴한 14대 심수관(91·대한민국 명예총영사)을 만났다. 그는 일본군에 붙잡혀 전라도 남원에서 끌려온 조선 도공 심당길의 직계 후손이다.
미야마 마을에 정착한 조선 도공의 후손들은 대부분 메이지 유신과 일제의 한반도 침탈 등을 거치면서 모진 차별을 견디지 못해 일본 성(姓)으로 바꿨다. 심당길과 함께 붙잡혀온 박평의의 12대 후손 박수승은 도자기를 팔아 번 돈으로 도고(東鄕)라는 일본 성씨를 샀다. 태평양전쟁 당시 외상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박무덕·1882∼1950)가 바로 박수승의 아들이다.
그러나 심수관 가문만은 무려 420년간 ‘청송 심씨’를 고집스레 지켜오고 있다. 14대 심수관은 “뿌리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았다”고 짧게 이유를 댔다. 그 대가로 선조들과 그가 감내해야 했을 지난한 삶이 읽혀졌다.
심수관요는 아직도 조선식 오름가마를 고집하고 있었다. 1대부터 사용해 오던 가마를 조금씩 확장하면서 지금껏 유지해 오고 있다고 한다. 1873년 12대 심수관은 이 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大花甁)를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해 이름을 떨쳤다. 이후 사쓰마야키를 전 세계로 수출하는 길을 터놓았다. 1964년 아버지(13대 심수관)로부터 습명을 받은 14대 심수관 역시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고향을 잊을 수가 없소이다’의 작품 속 주인공으로 소개될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
필자는 심수관요의 오름가마 터에서 강렬히 치솟아 오르는 땅의 기운에 흠뻑 취했다. 지기(地氣) 에너지가 응집된 혈(穴)에 가마가 정확히 놓여 있었다. 도자기 전시실에 놓인 12대 심수관과 14대 심수관의 작품들에서 동일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를 그제야 알아챘다. 제작자만 다를 뿐 가마 터의 같은 땅기운을 쐬고 나온 도자기였기 때문이다.
필자의 풍수 소감을 14대 심수관에게 전달했다. 그는 명당과 풍수지리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가마 터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의 삶은 대를 이은 역사와의 고된 싸움이었소” 하고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그의 눈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는 안팎으로 치열하게 역사와 싸워 왔다. 외적으로는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치러 왔다. 그런 한편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작품 세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내적인 전쟁을 벌여 왔다. 그의 ‘역사’라는 말이 필자에게도 대못처럼 박혀 들어왔다.
심수관요를 찾아갔을 때, 한국에서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임명과 관련해 식민사학과 민족사학이라는 역사관 논쟁이 들끓고 있었다.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단군의 고조선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싸움이었다. 그런 역사관 논쟁이 저급한 정치 논리와 역사학계의 밥그릇 싸움으로 필자에겐 비쳤다. 1600년대에 지은 다마야마(玉山)신사에서 지금도 단군을 기리며 역사를 지켜오는 심수관 가문을 보면서 그저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