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 사회부 차장
한국 운전자들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흔히 듣는 ‘조언’이다. 머리 깨지고 뼈 부러지는 사고가 아니다. 아픈 것도 같고 멀쩡한 것도 같은, 그런 사고 때 듣는 말이다. 초보 시절만 해도 운전자들은 ‘이래도 되나’라며 망설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제 발로 병원을 찾는다. 병원 침대에 드러누운 이들의 속내는 딱 하나다. “어차피 보험사 돈인데….”
반대로 교통사고를 냈을 때도 마찬가지다. 한국 운전자들은 자신의 과실로 발생한 교통사고 앞에서 유난히 당당하다. 누가 봐도 가해자인데 일단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내 탓이 드러나도 별로 미안해하지 않는다. 가벼운 접촉사고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죽을 정도 아니면 상대방이 다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가족과 지인 중에 가해 운전자의 사과 방문은커녕 전화 한 통 못 받아 본 경우도 다반사다. 사고 낸 운전자들의 속내는 모두 같다. “어차피 보험사가 처리할 텐데….”
주범은 교통사고처리특례법(교특법)이다. 1981년 만들어져 이듬해부터 시행됐다. 요지는 이렇다. 교통사고 가해자가 손해배상금 전액을 보상하는 보험 또는 공제에 가입했으면 처벌하지 않는 것이다. 단, 사고 원인이 가해자의 신호위반 무면허운전 등 중대한 과실 8개에 해당되면 처벌이 가능하다. 그동안 몇 차례 개정으로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 위반 등이 더해져 11개가 됐고 차량 낙하물이 추가돼 올해 말 12개로 늘어난다.
그럴듯한 이유에 예외조항까지 뒀지만 결국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유전무죄를 합법화한 셈이다. 물론 모든 교통사고 가해자를 전과자로 만들 순 없다. 가벼운 접촉사고로 경찰 검찰 법원을 쫓아다닌다면 그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을 것이다. 하지만 40년 가까이 지나면서 교특법의 적폐는 이런 긍정적 효과를 덮었다.
언제부턴가 평범한 운전자들이 운전대만 잡으면 헐크로 변하고 돈이 많다는 이유로 죄 지은 사람들이 당연한 듯 큰소리친다. 수사기관은 “어지간하면 보험 처리 하시죠”라며 유전무죄 확립에 일조한다. 2015년 보험사 접수 교통사고는 114만 건인데, 경찰에 접수된 사고는 고작 23만 건인 이유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진짜 교통사고 피해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다. 아홉 살 어린이에게 전치 16주의 부상과 후유장애까지 안긴 한 운전자는 보험에 가입했고 중상해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헌법재판소가 이를 바로잡아 뒤늦게 지난달 처벌이 이뤄졌다. 만약 헌재 결정이 없었다면 피해 어린이와 가족은 가해자의 사과도 못 받고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경찰에 접수되지 않거나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은 교통사고 중 이런 경우가 또 없지 않을 것이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