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함안 말이산 고분 아파트 공사장서 ‘요상한’ 물건 발견… 신고 받은 발굴팀 ‘말 갑옷’ 확신 열흘간 이쑤시개로 흙 긁어내자 2.3m 원형 그대로 모습 드러내 강국 틈바구니서 고유 문화 지킨 아라가야의 실체 생생하게 보여줘
3일 경남 함안군 말이산 고분군에서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이 발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아라가야 최고 지배층의 무덤 봉분들이 능선을 따라 늘어서 있다. 함안=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3일 찾은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고령 대가야와 더불어 위세를 떨친 아라가야의 왕릉답게 5∼10m 높이의 고총들이 장관을 이뤘다. 신라, 왜(倭)로 가는 길목에 있던 아라가야는 주변 강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고유 문화를 지키며 수백 년 동안 생존했다. 1992∼1996년 말이산 고분을 발굴한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4)은 “함안군 주민들 덕분에 아라가야 고분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 신문배달 소년이 살린 가야 무덤
1992년 6월 발굴된 함안 말이산 고분군 내 마갑총(위 사진). 실선으로 표시된 건 말 갑옷으로, 아래는 보존 처리를 마친 뒤 모습이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국립김해박물관 제공
1992년 6월 6일 오전. 함안 성산산성을 한창 발굴 중이던 박종익 당시 학예연구사(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가 평소 친분이 있던 한 일간지 지국장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배달소년이 인근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요상한’ 물건을 주워 왔다는 것이다. “암만 봐도 문화재 같다”는 사학과 출신 지국장의 말에 박종익은 꽃삽을 내려놓고 한달음에 현장으로 달려갔다.
소년이 주워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 넣은 쇳조각을 본 순간 그는 ‘말 갑옷(馬甲·마갑)’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조영제 경상대 교수와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을 발굴할 당시 비슷하게 생긴 말 갑옷 조각을 본 적이 있었다. 소년이 발견한 조각은 황갈색 녹이 두껍게 낀 상태였고, 말에 두른 갑옷답게 길이는 10cm가 넘었다.
갑옷 조각은 굴착기로 배수로를 판 구덩이에서 발견됐는데 다른 조각들도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박종익은 즉시 도청에 전화해 공사를 중단시킨 뒤 성산산성 발굴현장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갑옷 수습 임무를 맡은 이주헌이 현장에 급파됐다.
1주일에 걸쳐 흙을 조심스레 제거하자 길이 8.9m, 너비 2.8m의 거대한 덧널무덤(목곽묘)과 함께 말 갑옷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갑옷을 모두 노출시키는 데 열흘이 더 걸렸다. 1500년이 흘러 부식이 심한 갑옷 표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무사히 들어내기 위해 6명이 달라붙어 오직 이쑤시개로 흙을 긁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백제와 교류 흔적
말이산 고분에서 출토된 아라가야의 ‘화염(불꽃)무늬 투창 굽다리접시’.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무엇보다 말이산 고분의 묘제가 시대에 따라 널무덤(목관묘)과 덧널무덤,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으로 다양하게 변화된 것도 주변국 영향이 컸다. 이 중 6세기 전반에 나타난 굴식돌방무덤은 백제의 무덤양식을 들여온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강성해진 신라의 서진(西進)에 위협을 느낀 아라가야는 백제, 대가야와 연맹을 맺은 상태였다. 이주헌은 “마갑총에서 나온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도 백제 중앙과 아라가야의 긴밀한 교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35> 경주 나정 발굴
<34> 공주 공산성 발굴
<33> 합천군 옥전 고분군
함안=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