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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만주… 민중의 치열한 삶 생생하게 복원”

입력 | 2017-07-05 03:00:00

배삼식 극작가 신작 ‘1945’




배삼식 극작가는 ‘1945’를 쓸 때 역사적 자료뿐 아니라 염상섭 채만식 등의 소설도 꼼꼼하게 살펴봤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1945년 광복 직후 만주. 조선인들은 가난과 전염병에 시달리며 조국으로 돌아갈 기차를 간절히 기다린다. 일본군 위안소를 탈출한 명숙은 지옥을 함께 건넌 일본인 여성 미즈코를 벙어리 동생으로 속여 조선으로 데려가려 한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5∼30일 공연되는 배삼식 극작가(47)의 신작 ‘1945’다. 김정민 이애린 김정은 박윤희 등이 출연한다.

지난달 30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그는 “1945년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의 뿌리가 된 해이고, 만주는 조국에서 내몰린 이들이 2등 국민으로 살아야 했던 공간이다”고 말했다. 그는 “관념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는 이 시공간에서 구체적인 욕망을 갖고 하루하루 살아갔던 이들의 삶을 생생하게 불러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열하일기만보’ ‘하얀 앵두’ ‘3월의 눈’ ‘먼 데서 오는 여자’로 동아연극상, 대산문학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쓴 배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1945’에서는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가차 없이 버리려는 이가 있고, 내 한 몸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도 타인을 보듬어 안고 가려는 이도 있다. 작가는 이들 한 명 한 명의 삶을 치열하게 묘사하지만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개개인의 삶에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에요. 인간을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인 욕망을 쉽게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런 시각은 분노와 혐오가 넘치고, 생각이 다른 이에게 즉각 옳고 그름의 칼날을 들이대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 위험하다고 느끼는 그의 우려와도 맞닿아 있다.

‘1945’는 시간과 공간적 배경은 물론이고 인물의 캐릭터도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명숙은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는 당찬 여성으로 그렸다. 그동안 많은 작품에서 봐왔던 위안부 피해자와는 사뭇 결이 다르다.

“명숙은 지옥에서도 버티며 삶에 대한 의지와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인물이에요.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요. 명숙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인간의 존엄을 돌려드리고 싶었어요.”

극에서 명숙은 “산 사람은 뭐 영영 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언제든 한 번 가는 건 마찬가지지. 결국엔 혼자 가야 하는 건데, 뭐”라고 읊조린다. 암 투병을 하다가 5월 세상을 떠난 아내 이연규 배우를 지켜보며 쓴 대목처럼 느껴졌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아내가 많이 아파 힘들어할 때 무서운 꿈을 꿨다며 깨어나서 한 말이었어요.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제 작품을 가장 먼저 읽은 후 부족한 점을 짚어내고 용기도 줬던 아내는 제일 믿었던 독자이고 평론가였어요.”

그는 스스로를 ‘기술자’라고 불렀다. “희곡을 쓴다는 건 무대라는 형식에 맞게 표현하는 기술을 가져오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제 글이 배우들의 육체를 통해 말이 되고 움직임이 되는 과정이 예전보다 부드러워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기쁠 거예요. 어줍지 않고 성마르지 않은, 믿음직한 기술자가 되고 싶어요.”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