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사망자 2000명 줄이자/시즌2]<10> 상습 음주운전자에 의무화 추진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중구 남산3호터널 앞. 한참을 멈춰 서있는 외제차 안에 30대 남성이 잠들어 있었다. 힙합 듀오 ‘리쌍’의 멤버 길(본명 길성준·39)이었다. 경찰은 그의 혈중 알코올 농도를 측정했다. 면허 취소 수치인 0.165%였다. 앞서 그는 2014년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됐다. 이듬해 사면을 받고서 또 음주운전을 한 것이다. 배우 윤제문(47)은 지난해 3번째 음주운전에 적발됐다. 이들은 사과했지만 반복된 음주운전을 향한 시선은 싸늘했다.
‘음주운전 시동잠금장치(IID·Ignition Interlocking Device)’는 이런 상습 음주운전자를 대상으로 한다. 최근 사회 전반적으로 음주운전은 조금씩 줄고 있지만 상습 음주운전은 늘고 있다.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폐해도 심각하다.
하지만 음주운전으로 적발돼 처벌을 받아도 운전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술을 먹고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음주운전 근절을 개인의 의지에만 맡기기보다 엄격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게 경찰과 교통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음주운전 시동잠금장치 도입은 조건부 운전면허제 시행으로 이어진다.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 또는 정지된 운전자 가운데 생계 등의 이유가 인정되면 일정 기간 후 조건부 면허를 발급하는 것이다. 이때 조건이 음주운전 시동잠금장치다. 운전면허증에는 조건부 내용이 표기된다. 원래 예정된 면허 취소나 정지 기간이 끝나도 1, 2년 더 시동잠금장치를 부착하도록 제한하는 게 경찰의 구상이다.
경찰은 상습 음주운전 예방은 물론이고 생계형 음주운전자의 무면허 운전도 줄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음주운전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객관적 절차를 통해 확인되면 합법적으로 운전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시동잠금장치는 교통사고 감소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뉴멕시코주는 2002년 시동잠금장치를 의무화했다. 당시 225명이었던 음주운전 교통사고 사망자는 2010년 140명으로 줄었다. 애리조나주도 2007년 도입 당시 399명이던 사망자가 2014년 199명으로 감소했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에 따르면 음주운전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연평균 8125억 원. 시동잠금장치 도입으로 음주운전이 10%만 줄어도 800억 원의 경제적 손실을 막을 수 있다.
이미 국회에는 시동잠금장치를 도입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제출돼 안전행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조건부 운전면허 대상자가 시동잠금장치가 없는 차를 운전할 경우 징역 또는 벌금으로 처벌하는 내용이다. 기술적 문제도 없다. 국내 시동잠금장치 관련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부 업체는 해외 수출까지 하고 있다. 음주측정기는 물론이고 운전자 본인 확인을 위한 실시간 얼굴 인식 기능까지 갖췄다. 시동잠금장치 설치 운전자들의 운행기록을 실시간으로 관리하는 센터와 통신설비 마련도 예산만 뒷받침되면 가능하다. 음주운전 단속과 교통사고 예방에 투입되는 예산을 감안하면 조기 도입이 어렵지 않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다.
음주운전 시동잠금장치는 외국에선 이미 보편적인 자동차 안전기기다. 미국에서는 1986년 캘리포니아주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주에서 시행 중이다. 음주운전 재범자뿐 아니라 초범이라도 교통사고를 일으킨 운전자의 차량에 의무적으로 장치를 부착하도록 했다. 호주 스웨덴 캐나다 프랑스 핀란드 네덜란드는 대중교통뿐 아니라 통학버스에도 반드시 달도록 하고 있다. 블랙박스와 내비게이션 등의 장치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이는 음주운전으로 인한 국가적 손실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특히 교통 선진국일수록 음주운전을 더 이상 운전자 개인의 통제 아래에 놓아선 안 된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초 미국 노바사우스이스턴대의 이오아나 포포비치 박사 연구팀은 알코올약물사용장애(SUD) 치료에 대한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한 뒤 음주운전이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999년 핀란드에서도 음주운전이 정신질환과 연관돼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김상옥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해외에서는 면허 정지나 취소 같은 행정처분보다 음주운전 시동잠금장치 설치가 더 효과가 크다고 본다”며 “시동잠금장치 장착이 운전자에게 음주운전을 단념하게 하는 심리적 제동장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형석 skytree08@donga.com·정성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