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의 부음이 실린 동아일보 1986년 7월14일자 6면.
동아일보 1986년 7월14일자 6면에 짧은 기사가 실렸다. 나흘 전 세상을 떠난 박태원의 부음 소식이었다. 그가 월북한 뒤 남한의 가족들이 1964년 사망신고를 냈으나 실제의 삶은 22년 뒤에 마쳐졌다. 지금이야 교과서를 통해 청소년기부터 만나게 되는 유명한 소설가이지만, 이 부음이 실리기 전까지 그는 금기시됐던 작가였다. ‘월북(越北)’이라는 이력 때문이었다.
절친했던 문우 이상과 함께 한 박태원(오른쪽). 동아일보 DB
1988년 해금 조처가 시행되면서 그의 이름은 복원됐다.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등 한국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작들이 소개됐다. 실명과 뇌출혈로 인한 전신불수 중에도 아내에게 구술하면서 장편 ‘갑오농민전쟁’을 완성한 것이 알려지면서(동아일보 1993년 10월10일자) 집요한 창작열도 주목받았다.
차남 재영 씨는 해금 뒤 동아일보와의 인터뷰(1988년 7월23일)에서 “어렸을 적 부친의 산책길에 자주 따라다녔다. 소박하고 다정다감했던 분”이라고 회고하면서 “아버지의 직업을 따를까도 했으나 어머니가 간곡하게 만류해 접었다”고 털어놓았다. 작가의 예술 혼은 삼대 째 이르러 발현됐다. 최근 영화 ‘옥자’로 핫이슈가 된 영화감독 봉준호 씨가 박태원의 외손자다.
박태원의 예술적 재능은 외손자인 봉준호 감독에게 내림했다. 사진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 동아일보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