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게티즈버그는 한국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의 명연설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미국에선 북군이 승기를 잡아 오늘날 미합중국 탄생을 가능케 한 남북전쟁 최대의 격전지로도 유명하다. 링컨의 연설은 그곳에서 산화한 수만 명의 영혼을 달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만큼 게티즈버그는 형제끼리 피를 뿌려 가며 만들어낸 ‘소중한 미국’을 상징하는 곳이다. 버몬트주에서 왔다는 이라크전 참전용사 피터 설리번 씨는 “이런 미국을 지키는 데 참전했던 건 일생의 영광”이라고 말했다.
최근 ‘화성-14형’을 비롯해 북한이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할 때마다 미 언론은 “북한 미사일이 미국 땅에 닿을 수 있다(reach US soil)”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영토(territory)라는 국제법적 개념은 잘 쓰지 않는다. 어렵게 일군 조국의 흙 한 줌도 적에게 내어줄 수 없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애국자(patriot)라는 표현이 거부감 없이 사용되는 것도 나라를 지키는 사람, 제도에 대한 미국인들의 무조건적 신뢰를 보여준다. 적 미사일을 요격하는 무기(패트리엇 미사일), 최고 인기 있는 미식축구팀 이름(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도 들어간다. 9·11테러 후 만든 테러방지법 이름도 애국법(Patriot Act)이다. 우리 같으면 ‘국뽕’(지나친 애국주의)이라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혹자는 이런 기류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때문에 도드라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트럼프보다 표현이 고상했을 뿐 ‘미국을 지킨다’는 목표는 다르지 않았다. 오바마가 추진했다 트럼프가 좌초시킨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의 시장을 확장시키려는 오바마판 ‘미국 우선주의’의 세련된 버전이었다고 나는 본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도 한국, 본질적으로는 주한미군을 지키기 위해 오바마 때 결정됐다.
이렇게 미국을 알아가던 차에 기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북핵 한국 주도권론’을 접하고 있다.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 당시 만난 문 대통령은 이 대목을 설명하며 유독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기대와 우려가 교차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좋든 싫든 북핵에 대처하고 우리를 지키려면 아직은 미국의 협력이 절대적이다. 그걸 이끌어 내려면 겉으로 드러난 외교적 수사 외에 미국인들의 의식 밑바닥에 흐르는 본질까지 들여다보려는 수고와 인내가 필요하다. 과연 우리는 그러한가? 한국 외교의 치열한 각성과 건투를 빌 뿐이다.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