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산업부 기자
남양유업 대리점 물량 밀어내기 사건이 시발점이 됐다. 30대 영업사원이 50대 대리점주에게 ‘죽여 버릴 거야’, ‘이 ××야’ 등 생생하게 욕을 퍼부은 녹음 파일이 공개됐다. ‘라면 상무’, ‘땅콩 회항’ 등 안하무인형 갑질도 유명하다. 요즘은 프랜차이즈 업체의 ‘피자 통행세’ 같은 구조적 갑질이 지탄을 받고 있다. 이런 갑질을 정의하자면 ‘계약서, 법, 사회적 합의를 어기고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며칠 전 감사원이 발표한 면세점 점수 조작 사태를 보며 떠오른 단어는 갑질이었다. 정부는 공정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와 법이 정한 면세점 선정의 원칙을 모두 깨뜨렸다.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오갔다는 말은 더 충격적이다. 2015년 11월 2차 심사 당시 ‘롯데에 교훈을 남기자’라는 말이 나왔다. 롯데를 탈락시키자는 뉘앙스에 다름없었다.
정부는 갑질을 근절하기 위해 애써 왔다. 억울함도 문제지만 결국 시장 질서를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공정한 심판자가 돼야 할 관세청이 왜 점수까지 조작했는지는 검찰이 밝힐 일이다. 그런데 이미 시장에 준 충격과 폐해는 누가 보상할 것인가.
2015년 11월 롯데와 SK가 탈락했을 때, 홈쇼핑 업계도 비상이 걸렸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홈쇼핑도 5년마다 재승인 심사를 받는다. 당연히 기준 미달 기업은 허가권을 뺏는 게 맞다. 하지만 당시 기업들이 받은 시그널은 ‘찍히면 죽는다’였다.
정황만으로도 술렁였는데 실제 점수까지 조작됐다니 앞으로 정부 허가 사업마다 뒷말이 나오고 의혹이 난무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결국 대관(對官) 조직에 최고 인재를 보내고, 정부가 돈 내라면 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하는 의구심 때문에 불필요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명백한 자원 낭비다.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은 탈락 직전 서울시내 매출 3위의 면세점이었다. 여길 탈락시키고 선정된 두타면세점이 금방 이 정도 위상을 갖긴 어려운 상태다. 효율적 자원 배분이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효율보다 상생이 더 중요한 대의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중소기업은 상생에서 배제됐다. 배려한다고 중소·중견기업 몫을 만들어 놓고 그 후 계속 특허권을 남발했기 때문이다. 감사원 감사 결과에서 이 또한 청와대의 지시였음이 밝혀졌다. 2015년 초 이후 1∼3차 면세점 심사에서 새로 생긴 7개 특허 중 5개가 대기업 몫이다.
정부에 대한 불신, 실적 악화, 검찰 수사, 특허 지속에 대한 불확실성, 민사소송 가능성 등 이번 사태로 인한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정부 갑질’이 어떤 갑질보다 무서운 이유다.
김현수 산업부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