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애견인 1000만 시대의 명암
“20초가 20년처럼 길었어요.”
직장인 이모 씨(32·여·경기 시흥시)는 올 4월 26일을 잊지 못한다. 이 씨에게는 악몽 같은 날이 아니라 악몽 그 자체다. 이날 이 씨는 회사 근처를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건물 틈에서 개 한 마리가 뛰쳐나와 이 씨에게 달려들었다. 그냥 개가 아니었다. 맹견 중의 맹견인 ‘로트바일러’였다. 당황해 넘어진 이 씨는 무차별 공격을 받았다. 비명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겨우 개를 떼어 놓았다.
로트바일러가 이 씨를 공격한 시간은 20초 남짓. 짧은 시간이지만 이 씨는 20년처럼 느꼈다. 로트바일러는 이 씨의 오른쪽 종아리와 팔뚝 어깨 등을 날카로운 이빨로 물었다. 종아리 부상이 심각했다. 장기 재활치료가 필요해 이 씨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뒀다. 이 씨는 “한때 유기견 보호 활동을 할 정도로 개를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조금만 덩치 큰 개를 봐도 그날 일이 떠올라 몸서리가 난다”고 말했다.
○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맹견의 습격
지난달 27일 전북 군산시에서 ‘맬러뮤트’ 한 마리가 길을 걷던 A 군(9)의 양팔과 다리 등 10여 곳을 물고 달아났다. 산책하던 견주(개 주인)가 목줄을 놓친 것이다. 출동한 119구조대가 쏜 마취총을 맞고 야산으로 달아난 맬러뮤트는 4시간 만에 잡혔다. 맬러뮤트는 키 55∼70cm, 몸무게가 34∼50kg에 이르는 대형견이다. 알래스카 등지에서 썰매견으로 이용된다.
같은 달 16일 서울 도봉구에서 집 밖으로 나온 맹견 2마리가 행인 3명을 공격했다. 목줄 없이 마당에서 길러지던 개들은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대문 틈을 비집고 나와 거리를 활보했다. ‘도고 아르헨티노’와 ‘프레사 카나리오’는 통제 불능 상태로 3명에게 상처를 입혔다. 도고 아르헨티노는 현장에 출동한 119구조대가 쏜 마취총을 맞고 죽었다. 두 견종 모두 다 크면 키 60cm, 몸무게 40kg 이상인 대형견이다. 특히 도고 아르헨티노는 영국과 호주, 싱가포르 등지에서는 사육이나 반입이 금지된 맹견이다.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까지 일어났다. 올 5월 강원 원주시의 개 사육장에서 주인 권모 씨(65·여)가 기르던 도사견에게 물려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권 씨는 도사견 2, 3마리가 있던 사육장에 들어가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권 씨를 구하러 들어간 남편 변모 씨(66)도 팔 등에 부상을 입었다. 2015년 2월 경남 진주시에서 80대 노인이 핏불테리어에게 밥을 주다 공격을 당해 사망했다. 같은 해 6월 충북 청주시에서 15개월 남자아이가 역시 집에서 기르던 핏불테리어에게 가슴 등을 물려 사망했다. 7일 경북 안동시의 한 농가의 안방에서는 70대 노인이 8년간 키우던 풍산개에게 물려 숨졌다.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반려견 물림 사고’는 2011년 245건에서 2012년 560건, 2013년 616건, 2014년 676건으로 증가했다. 2015년에는 1488건으로 급증했고 지난해에도 1019건이나 됐다.
사고 급증의 원인으로 한국의 ‘펫티켓’(‘펫’과 ‘에티켓’의 합성어) 수준을 지목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해 초 경기 수원시 광교호수공원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견주 B 씨(42)가 로트바일러 3마리를 데리고 애견놀이터를 방문했는데 한 마리가 C 군(10)의 다리를 문 것이다. 겨울이라 두꺼운 옷을 입어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B 씨는 “(로트바일러가) 아직 아기라서 괜찮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C 군의 부모가 발끈하면서 언쟁이 붙었다.
B 씨는 평소 애견놀이터에서 로트바일러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경찰견이나 군견 훈련 때 쓰는 팔 보호대까지 착용하고 이를 물어뜯게 했다. 한 견주가 “맹견은 공격훈련을 하기보다 입마개를 착용시켜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항의했으나 “간섭하지 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C 씨는 “물어뜯기 훈련은 애견놀이터에서 몇 번 가볍게 시켜본 게 전부”라며 “‘우리 아기들’은 평소 예절교육을 잘 시켜 함부로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요즘 항공사도 개 때문에 골치다. 주인과 함께 비행기를 타는 반려동물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에 따르면 지난해 반려동물과 기내에 동승한 국제선 승객은 5940명. 수화물로 운반된 대형견을 합치면 국적기를 타고 국내외로 이동한 반려동물은 지난해 3만7334마리나 된다. 한 항공사 관계자는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확산되면서 (수화물로 운송해야 할) 대형견까지 기내에 데리고 타겠다는 승객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이 진단한 애견 사고의 원인과 해법은 간단하다. “동물은 결국 사람 하기 나름”이라는 것. 주인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동물을 키워도 똑같은 사고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반려견을 충분히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훈련시키는 걸 주인의 ‘기본’으로 꼽았다. 한 애견 전문가는 “별다른 지식도 없는데 남들 앞에 무턱대고 ‘강해 보이려고’ 맹견을 기르는 사람이 젊은층 사이에 꽤 있다”고 우려했다.
또 주인이 본인의 개를 가장 잘 아는 만큼 가장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주위 사람이 개를 보고 귀엽다며 무턱대고 만지려 하면 우선 제지시키는 게 바람직하다. 사람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개의 동작도 못 하도록 해야 한다. 개가 앞발을 들고 서서 사람과 박수 치는 듯한 동작은 자칫 아이나 노약자를 덮치는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외출은 가급적 인파가 많은 곳이나 시간대를 피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목줄과 입마개를 착용시키는 건 기본이다. 맹견으로 분류된 견종에게 목줄과 입마개를 하는 건 이미 의무화됐다. 위반 시 과태료는 최대 50만 원 이하다.
늘어난 애견 인구만큼 견종에 대한 적정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현행 ‘동물보호법’에 따르면 국내에서 맹견으로 분류된 견종은 도사견과 아메리칸 핏불테리어, 아메리칸 스태퍼드셔테리어, 스태퍼드셔불테리어, 로트바일러 등 5종에 불과하다. 최근 시민을 공격했던 도고 아르헨티노 등은 영국 등에서 사육금지 동물로 규제하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평범한 반려동물로 취급받고 있다.
영국에서는 1991년부터 ‘위험한 개 법(Dangerous Dogs Act)’을 제정해 시행 중이다. 도고 아르헨티노와 필라브라질레이루 등은 ‘특별통제견’으로 분류돼 관리받는다. 특별통제견을 키우려면 법원의 허가까지 받아야 한다. 이후 견주는 정부로부터 지속적인 관리를 받는다. 대인배상보험 가입과 중성화 수술, 마이크로칩 삽입, 입마개 착용 등을 지켜야 하고 임의로 번식과 판매 교환 등도 할 수 없다. 개가 사람을 다치게 한 경우 견주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사망에 이르게 하면 최대 14년의 징역에 처해진다.
뉴질랜드는 올 2월 맹견관리자격 제도를 도입했다. 견주가 위험한 개를 다룰 능력이 되는지, 적절한 사육환경을 갖추고 있는지 등을 검토해 일정 기준을 넘어야 맹견을 기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해당 맹견의 기질도 검사하고 견주에게 법적 처벌 등이 포함된 교육을 받게 한다. 스위스도 면허제를 도입하고 맹견 등에게 반드시 정기적인 훈련을 받도록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맹견 사고가 이어지면서 최근 농림축산식품부가 견주 관리 강화를 골자로 하는 대책을 검토하기로 했다. 맹견 범위를 확대하고 수입과 생산 판매 단계마다 내용을 신고하게 하는 등의 내용이다. 전문가들은 긍정적이다. 이웅종 이삭훈련소장은 “맹견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풀어놓고 기르는 행태는 매우 위험하다”며 “특히 영국처럼 사고 발생 등에 대한 견주 처벌 강화를 포함시킨다면 우리도 반려동물 관련 사고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특교 kootg@donga.com·김배중 기자
※ 대표적 맹견들
(왼쪽)
코카시안 오브차카(Caucasian Ovtcharka)
●원산지: 러시아
●키: 63∼71cm
●체중: 46∼66kg
●크기: 초대형
●특징: 600년간 양떼를 침략자들에게서 보호해온 어마어마한 덩치의 경비견. 평소에는 믿음직스러운 목축견이지만 위험한 상황에 당면하면 사전 경고없이 난폭하게 돌변.
(오른쪽)
로트바일러(Rottweiler)
●원산지: 독일
●키: 58∼69cm
●체중: 40∼50kg
●크기: 대형
●특징: 현재 국내에서 번식되고 매매되는 모든 견종 중에 매매 가격이 가장 비싼 개.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멧돼지 사냥개로 쓰일 만큼 사나운 맹견.
(왼쪽)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rican Pit Bull Terrier)
●원산지: 미국
●키: 46∼56cm
●체중: 23∼36kg
●크기: 중형
●특징: 운동선수 같은 근육질 몸매, 고통을 참아내는 인내력과 강한 힘, 목표물에 대한 높은 집중력 때문에 오랫동안 투견으로 사육. 하지만 주인에 대해서는 애교가 넘치고 보호 본능이 강한 편.
(오른쪽)
도고 아르헨티노(Dogo Argentino)
●원산지: 아르헨티나
●키: 62∼68cm
●체중: 40∼45kg
●크기: 대형
●특징: 순한 생김새와 달리 멧돼지나 퓨마 등 야생동물을 잡을 만큼 힘이 센 개. 얼마 전 대문 밖을 빠져나와 서울 한복판에서 시민들을 습격해 논란을 일으킨 개.
(왼쪽)
도사(Tosa)
●원산지: 일본
●키: 60cm
●체중: 30∼100kg
●크기: 대형
●특징: 투견으로 사육되고 개량돼 키워진 견종. 괴력 수준의 엄청난 체력을 바탕으로 말리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근성이 특징.
(오른쪽)
캉갈(Kangal)
●원산지: 터키
●키: 80∼100cm
●체중: 60∼100kg
●크기: 초대형
●특징: 터키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터키 국견(國犬). 송아지보다 큰 거대한 덩치로 늑대까지 때려잡는 개로 알려짐. 이빨이 무척 튼튼해 뼈까지 씹어 먹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