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논설위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10일 국회에서 “(시진핑이) 혈맹이란 단어를 썼지만 그것은 지금이 아닌 과거 북-중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데서 의문이 다소 풀릴 것도 같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귀에 대고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각인시킨 시진핑이니 그런 얘기도 할 법하겠다고 넘기려 했다. 한데, 그것도 아니란다.
혈맹, 폐기된 구시대 용어
중국에서 과거 북-중 관계를 표현했던 ‘혈맹’은 1990년대 초 한중 수교와 김일성 사망 이후 공식 폐기됐다. 2003년 방중한 조명록 북한군 차수가 북-중 관계를 ‘피와 탄환’으로 표현하자 후진타오 주석은 ‘전통적 우의관계’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과거 역사를 얘기할 때 ‘피를 나눈’ ‘피로 맺은’ 같은 표현을 쓰긴 한다. 중국 권력서열 5위 류윈산도 재작년 방북 때 “피를 뒤집어쓰며 싸운 역사”를 거론했지만 ‘혈맹’이라곤 하지 않았다.
혹자는 피로 맺은 역사가 혈맹과 뭐가 다르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국이 그렇게도 그 말을 쓰기 싫어하는 것은 더는 북한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중국 학자들도 “강대국과 약소국 간 비대칭 동맹이었던 중조(中朝) 관계에선 개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드는 ‘미파요구(尾巴搖狗)’ 현상까지 나타난 미성숙한 국가관계였다”며 정상적 국가관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한다.(선즈화 ‘최후의 천조’)
사정이 이런데도 한국은 죽은 ‘혈맹’을 끄집어냈다. 북-중 관계를 벌려놔도 시원찮을 판에 국제사회가 두 나라를 더욱 끈끈한 관계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당장 동북아엔 ‘한미일 대 북중러’ 대결 구도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해설이 뒤를 잇고 있다.
‘미담’ 둔갑한 외교 事故
정상외교의 현장에서 벌어진 이해하지 못할 해프닝도 자랑스럽게 홍보하는 모양새다. 자료가 배포된 건 문 대통령이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없다”며 극도의 무력감을 표시한 바로 그날이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