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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흑인 용병-타타르 거인 투입했지만… 사천왜성 혈전 참패

입력 | 2017-07-15 03:00:00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사천왜성 전경. 사천왜성은 성벽과 성문이 일부 복원됐으나 원형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고, 지형 역시 매립으로 인해 원형을 잃어버렸다. 우측 상단의 비가 세워져 있는 석단이 천수각이고 위로 보이는 앞바다가 사천해전 현장이다. 사천=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전하, 소장이 얼굴이 색다른 신병(神兵)을 데리고 왔는데 소개하겠습니다.”

정유재란이 치열한 국면으로 치닫던 1598년 5월 26일. 선조 임금이 한양도성 인근에 주둔중인 명군 진영을 방문했다. 명군이 남해안 일대의 왜군을 공격하기에 앞서 한양에 머물면서 전열을 정비하던 때다. 명나라 파견군 장수 팽신고(彭信古)가 선조에게 자랑하듯 신병 소개를 자처하고 나섰다.

“어느 지방 사람이오? 대체 무슨 기술을 가졌길래?”

“호광(湖廣)의 극남(極南)에 있는 파랑국(波浪國·포르투갈) 사람입니다. 바다 셋을 건너야 호광에 이르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여 리나 됩니다. 그 사람은 조총을 잘 쏘고 여러 가지 무예를 지녔습니다.”(‘선조실록’)

선조는 중원 사람들도 보기가 어렵다는 신병을 뚫어져라 살펴봤다. 노르스름한 눈동자에 얼굴빛이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었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에다, 검은색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졌다. 팽신고는 신병은 칼 솜씨가 뛰어나고,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할 수 있으며, 또 수일 동안 물속에 있으면서 수족(水族)을 잡아먹을 줄도 안다는 등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16세기의 포르투갈 특수병 해귀

조선에서는 신병을 해귀(海鬼)라고 불렀다. 선조가 본 해귀는 흑인이었다. 해귀는 요즘으로 치면 해군 UDT 같은 포르투갈계 특수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포르투갈은 해외에서 식민지 경영을 하면서 재주 좋은 외국인 용병들을 고용했다. 명은 마카오를 조차(租借)한 포르투갈로부터 무기와 탄약 등을 사들이면서 흑인 병사(혹은 용병)들을 데려와 정유재란에 참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해귀의 등장은 당시 조선사람들에게는 진귀한 전쟁 뉴스였다. 소문은 왜군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으로 번져갈 정도였다. 해귀를 비롯한 명나라의 다국적 파병군이 한양으로 속속 모여들고 명군을 따라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상인들과 유흥을 돋우는 장사꾼들도 나타났다. 말을 타고 놀리는 품새가 사람 못지않은 원숭이들(楚猿)과 사람인 듯 원숭이인 듯 헷갈리는 원병(猿兵), 낙타, 기이한 노루(生獐) 등 조선에서는 좀체 구경하기 힘든 짐승들도 등장했다(‘난중잡록’). 조선의 수도 한양은 생김새가 색다른 병사들과 이국(異國) 풍물로 국제도시처럼 시끌벅적했다.

해귀는 정유재란 발발 직후 갑작스럽게 조선의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그러나 팽신고가 해귀를 선보인 지 3개월 후인 1598년 8월, 전라도 남원의 명군 진영에서 해귀 4명의 모습이 보였다는 기록을 제외하고는 전투 행적은 찾을 길 없다. 다만 해귀를 데리고 온 팽신고의 이름이 그 2개월 후인 10월, 경상도 사천에서 등장한다. 팽신고는 명나라의 사로병진(동로군, 중로군, 서로군, 수로군) 전략에 의해 중로군 소속으로 사천왜성 전투에 참가했다.

기자는 팽신고의 흔적을 쫓아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바닷가에 있는 사천왜성을 찾았다. 이 왜성은 해귀 뿐만 아니라 또다른 이국(異國) 병사들이 활약했던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성 둘레가 약 1km 남짓한 사천왜성은 바닷가와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이 바다와 접한 구조였다. 육지와 연접한 동쪽의 성벽 밑으로는 해자를 설치했다. 지금은 남쪽과 북쪽 바다가 매립돼버려 원 지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천왜성 앞바다는 임진왜란 시기에 이순신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선보이면서 왜군을 격퇴한 사천해전의 현장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ㄷ자 모양의 건축 구조였던 사천왜성은 성곽과 동쪽의 성문이 복원돼 외형적으로는 옛 성의 정취를 어느 정도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성의 가장 중심지인 천수각 자리에 6·25때 전사한 공군 장병 위령탑이 세워져 있어서 다소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사천왜성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각별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사천왜성은 일본군 전승지로 관리됐다. 사천왜성의 왜군들을 지휘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후손들이 당시 성터 일부를 사들여 공원으로 조성했다. 천수각 터에 사천신채전첩지비(泗川新寨戰捷之碑)라고 새긴 기념비도 세웠다. 1945년 광복 직후 이 지역 주민들이 없애버렸다.



거인(巨人)들의 전투 현장 사천왜성

“요상한 거인(巨人)들이 쇠막대기로 성문을 마구 부수고 있다고?”

1598년 10월1일, 사천왜성의 동쪽 성문을 지키던 초병(哨兵)의 보고에 왜장(倭將) 시마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3만 명 규모의 중로군 연합군이 성벽을 겹으로 포위한 뒤 구간별로 분담해 공격해오는 통에 시마즈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공중으로는 연합군의 ‘불랑기포(佛狼機砲)’에서 쏘아대는 포탄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있었다. 불랑기포는 모포(母砲·포신)와 자포(子砲)가 분리된 공성용 대형 대포였다. 포탄을 장전한 여러 개의 자포를 준비해두고 하나의 모포에 바꿔 끼워가는 방식이어서, 장전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연속 사격이 가능했다. 잇단 포탄 세례를 맞은 성벽이 서서히 깨지고 허물어지던 중이었다.

“예. 덩치가 엄청 큽니다. 눈이 양옆으로 찢어져 올라갔고요. 수염이 좌우로 나뉘어 얼굴을 덮고 있어서 무섭게 생겼습니다.”

초병은 키가 매우 큰 거구의 병사 6명이 돌격대로 나서서, 성문을 허물고 있다고 말했다. 1만 명도 채 안되는 병력으로 필사적으로 성을 지키고 있던 시마즈는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시 저격병들을 불러라!”

시마즈는 사쓰마번(薩摩藩) 소속의 다네가시마(種子島) 사람들을 수배해 거인들을 저격하라고 명령했다. 다네가시마 철포병(鐵砲兵, 조총병)들은 총을 매우 잘 다루었다. 100보 떨어진 곳의 나뭇잎도 정확히 맞추고, 날아가는 새도 쏘아 떨어뜨릴 정도로 명사수들이었다. 다네가시마는 포르투갈 사람이 일본에 처음으로 머스킷(Musket) 총을 선보인 곳이다. 그 때문에 다네가시마 사람들은 일찍부터 총 쏘는 기술을 익혀왔다.

거인들은 결국 저격수들의 철포에 맞아서 차례차례 쓰러져 갔다. 거인들을 제거한 다네가시마 철포병들은 계속 명군을 사살했다. 명군은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진영을 뒤로 물리려 했다.

설상가상으로 명군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 팽신고의 진영에서 불랑기포 화약궤에 불이 붙어 크게 번져나갔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다. 명군들이 놀라 피해 달아나자, 왜군들이 기습적으로 돌격해왔다. 명나라 기병(騎兵)들은 이리저리 뛰며 헤맸다. 보병도 덩달아 우왕좌왕하다가 속절없이 일본군의 총과 칼날에 쓰러졌다. 이렇게 죽은 연합군 전사자 숫자가 7000∼8000명에 이르렀다. 너무나 어이없는 조명 연합군의 패배였다.

일본측 자료에서는 이 전투에서 희생된 거인들을 타타르 사람들이라고 했다. 명나라가 속국 타타르에게 힘센 사람들을 파견해줄 것을 요구하자, 특별히 타타르가 선별해 보낸 사람들이라고 했다(‘음덕기(陰德記)’ 제81권). 한국측 자료에서도 거인들의 존재가 나타난다. ‘우지개(牛之介) 3명이 있는데, 키와 몸뚱이가 보통 사람의 10배나 된다(‘난중잡록’)’는 것이다.

한편 타타르의 거인과 함께 참전한 4명의 포르투갈 해귀에 대한 전투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1599년 전쟁이 끝난 후 등장한다. 조선화가 김수운(金守雲)이 철수하는 명군들을 그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에서 해귀 4명이 보인다. 사천왜성 전투에서 희생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국적 연합군 중 누가 제일 센가

정유재란이 끝난 후 철수하는 명군들을 그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위의 그림). 아래 그림은 수레를 탄 해귀(海鬼)와 원병삼백(猿兵三百)이라는 깃발 아래의 원병들을 확대한 것이다. 이 그림을 설명하는 표제에는 ‘불랑국(포르투갈)의 해귀 4명은 살결이 검고, 누르스름한 머리가 방석둘레처럼 펼쳐졌어도 적선을 잘 뚫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해귀는 포르투갈 특수병만 지칭하지는 않았다. 잠수 실력이 뛰어난 동남아시아 출신 해귀들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중로군이 사천왜성 전투를 한창 치를 무렵, 서로군을 맡아 순천 왜교성 공략에 나선 명 제독 유정(劉綎)은 수십 종류의 해귀를 이끌고 나왔다(‘성호사설·경사문’).

유정은 중국 남쪽의 소수민족인 남만(南蠻)들을 정벌한 경험으로 동남아시아 출신들을 대거 사병(私兵)으로 삼아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정유재란 때도 그랬다. 그런 유정을 오랜 세월 따라다닌 수하 장수가 다국적 병사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달자(8子, 몽골 계통)는 상대하기 쉽고, 해귀(海鬼, 남만 계통)는 약간 강하고, 왜자(倭子, 일본군)가 가장 강하다. 순천 왜교성 싸움에서 적의 수급을 가장 많이 베어 온 군사는 모두 조선 사람으로서, 귀화하여 한군(漢軍)이 된 자들이었다. 제독이 매우 중히 여겨 조선군들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따라간 자가 300명이었다.”(‘성호사설·인사문’)

실제로 유정은 명나라로 귀국할 때 용맹한 조선인들을 가정(家丁)으로 삼아 데리고 갔다. 조선 영·정조 시기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도 이때의 다국적군 기세를 설명하고 있다.

“묘병(苗兵, 묘족 병사)은 귀병(鬼兵)이라고 해서 전투에 참가할 때 반드시 먼저 성에 올라가긴 했지만 왜구를 보면 지레 기가 꺾였다. 중국 군대는 더 그랬다. 그러나 조선인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잘만 쓴다면 천하의 막강한 군대가 될 수 있다.”

조선의 군사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투력이 강하기도, 약하기도 했다는 평가다. 결과적으로 다국적 연합군의 전쟁인 정유재란은 세계 각국 군사들의 전투력을 비교해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정유재란은 또 동원된 무기 면에서는 세계대전과 다를 바 없었다. 16세기의 최신형 무기인 일본의 철포(鐵砲)와 중국의 불랑기포는 당시 막강 무력을 자랑하던 포르투갈이 전수해준 것이다. 정유재란이 인적 물적 자원 모두에서 국제전 양상을 띤 것은 유럽의 힘을 이용하려 한 히데요시의 오랜 책략, 그리고 이에 편승한 유럽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 욕구 등이 얽히고설킨 결과였다.

사천=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