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안의 장군분(장군총). 지표에서 7m 지점에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방(구멍이 뚫어진 부분)이 있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필자는 고구려왕릉에서 한국 풍수문화의 특징을 발견한다. 현재 지안에는 고구려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8기 정도 있다.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무덤인 ‘태왕릉’을 중심으로 그 동쪽의 ‘임강묘’와 그 북쪽의 ‘장군분(장군총)’이 왕릉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지안시 서쪽의 ‘천추묘’와 ‘서대묘’, 칠성산고분군과 우산하고분군 중의 3기 등도 왕릉급 고분으로 꼽힌다. 대체로 6세기 이전 시기에 조성한 이 왕릉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한결같이 돌로 쌓아 올린 적석묘(積石墓) 형태이며 △같은 혈족의 왕릉이면서도 서로 멀리 떨어져 배치돼 있고 △시신을 안치한 무덤방(墓室)이 무덤마루, 즉 무덤 상단에 조성돼 있다는 점 등이다.
중국 북방지역의 고고학을 연구한 복기대 교수(인하대)는 “이런 구조는 만리장성 이남의 한족(漢族) 국가가 조성한 왕릉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무덤방의 위치다. 한족 국가가 세운 왕릉들의 무덤방은 대부분 지표 혹은 지하에 설치돼 있다. 반면 고구려 왕릉의 무덤방은 지표에서 상당히 떨어진 높은 위치에 설치돼 있다.
고구려의 옛 궁궐인 지안 시내 국내성(國內城) 터에서 동북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태왕릉(전체 높이 14m)은 무덤방이 지표에서부터 수직으로 10m 높이에 있다.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 4층 높이에 시신이 안치된 것이다. 또 ‘동방의 피라미드’로 유명한 장군분은 지상에서 7m 높이 정도에 돌로 만든 무덤방이 있다. 다른 왕릉급 무덤들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고구려왕릉의 무덤방이 왜 허공에 조성됐는지에 대한 국내외 연구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풍수의 눈으로 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고구려인들은 허공에서 에너지가 뭉쳐진 ‘공중혈(空中穴)’을 왕의 무덤방으로 설정한 뒤 그 위치에 맞게끔 돌로 쌓아올리면서 무덤을 꾸몄던 것이다. 대체로 공중에서 맺힌 혈은 하늘의 기운(天氣)이 아래로 하강하면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천기형(天氣形) 혈이라고도 한다. 마치 까치가 천기 에너지가 맺힌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듯이, 고구려 사람들은 천기형 혈을 이용했다. 천기 에너지를 무덤에 사용하는 방식은 백제와 신라의 이른 시기 적석 무덤들에서도 발견된다. 고구려 무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이 같은 풍수관은 중국 풍수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중국에서 풍수학의 이론체계는 당나라(618∼907년) 때 비로소 갖춰졌다는 게 정설이다. 지안의 고구려왕릉은 중국의 풍수설이 정립되기 훨씬 이전에 조성됐다.
게다가 중국의 풍수설은 철저히 땅 기운(地氣)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른바 장풍득수(藏風得水)설이다. 바람을 막아주고, 물을 얻을 수 있는(혹은 물이 보이는) 지표나 땅속을 명당으로 보는 논리다. 여기에 한국풍수의 한 원형인 천기(天氣)가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다.
풍수설의 발달 과정을 보면 초기 풍수는 땅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을 같이 중시했다. 풍수의 본디 말이 ‘감여(堪輿)’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감’은 하늘의 도(道)를, ‘여’는 땅의 도를 가리킨다. 사실 풍수란 말도 감여의 다른 표현이다. 감여학(풍수학)은 굳이 우선순위를 두자면 땅보다는 하늘 기운을 기준으로 삼았다.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실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고구려왕릉이다.
고구려가 우리 역사임을 보여주는 근거는 많다. 풍수학의 관점에서도 이는 분명하게 설명된다. 고약한 이웃이 우리 역사를 빼앗으려 하고 심지어 일부 자손들까지 자기 조상을 부정하는 세태 속에서 고구려왕릉을 찾는 마음은 황망하기 그지없다.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풍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