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국제부장
“할 말 없소. 그것까지 풀진 않길 바랐는데….”(김정일)
카스트로 쿠바 공산당 총비서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살아있었다면 17, 18일자 동아일보의 보도를 보고 이런 대화를 나눴을 것 같다. 김정은이 이끄는 북한 지도부가 평양 도심에 ‘북새상점’과 ‘보통강 류경상점’ 등 외화상점을 열어놓고 최상류층을 상대로 사치품 장사를 하고 있다는 미국 NK뉴스 보고서를 미국 CNN과 단독 보도한 기사였다.
반미 국가인 쿠바와 북한은 당초 주민들의 달러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쿠바 지도부는 위기 극복에 필요한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1993년 주민 달러 사용을 합법화하고 외화상점을 열어줬다. 예상대로 주민들은 불법적으로 수집해 집 장롱 속과 카펫 아래 숨겨 놓은 달러를 들고 상점 앞에 줄을 섰다. 그렇게 모은 달러와 미국 망명자들이 가족에게 보내온 달러 송금은 쿠바가 위기를 극복하는 원천이 됐다.
김 위원장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1997년 황장엽 당시 노동당 국제비서가 쿠바 수도 아바나를 방문했을 때 쿠바 당국자들은 그에게 생필품 배급소와 외화상점을 보여줬다. 그곳에서 김 위원장에게 줄 선물을 산 황 전 비서는 평양에 돌아가 시장의 생김생김과 파는 물건 등을 보고했다. 기자도 2007년 쿠바를 처음 방문했을 때 같은 곳에 들렀다. 계획과 시장이 공존하는 이행기 사회주의 경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아바나 시내 허름한 골목길에 차려진 배급소는 주민 한 명이 보름 정도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쌀과 설탕, 달걀 등 기본 식량을 단돈 33쿠바페소에 나눠주고 있었다. 국영기업 근로자 월평균 임금이 360∼720페소(약 15∼30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거저나 다름없었다. 행색이 초라한 노인들이 배급카드를 들고 줄을 선 모습은 영락없는 사회주의였다.
반면 시내 중심가 도로 옆 5층 외화상점에서는 독일 아디다스 운동화 한 켤레가 미국 월마트에서의 가격과 비슷한 60∼100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가장 싼 게 근로자 월급의 두 배였다. 주중 대낮인데도 쇼핑을 즐기는 쿠바 귀부인들이 바글바글했다. 남편이나 자신이 달러를 벌 수 있는 특권계층들이었다. 운동화뿐이랴. 상점마다 프랑스산 샤넬 향수와 코냑 ‘에네시 XO’ 등 대서양을 건너 온 사치품들이 즐비했다.
김 위원장이 살아 있었다면 카스트로에게 이렇게 변명하며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내가 선물로 주던 물건을 사라고 하면 엘리트들이 과연 아들(김정은)에게 충성할까? 그걸 모를 리 없는 아들이 무리하는 걸 보니 달러가 급한 게 분명해.’
아버지 사망 뒤 핵실험 세 번에 미사일 발사 수십 차례로 겹겹이 제재에 둘러싸였으니 김정은의 금고에 달러가 바닥나 가는 게 당연지사다. 마음을 헤아린 카스트로가 한마디 했을 것이다.
“아들 잘 타일러요! 핵미사일도 나라가 있은 다음이지, 그거 들고 무너지면 아무 소용없다고.”